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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그냥 가면 어쩝니까?

by 이우기, yiwoogi 2012. 6. 1.

5월 마지막 주 저녁 9시쯤이면 바람이 참 푸근한 때다. 자유시장 안 횟집에서 딱 알맞을 만큼 마신 나는 진주시청 앞에서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마침 장날이던 그날 시청과 자유시장 사이 골목은 남해에서 잡혀온 생선들이 버리고 간 비린내가 채 가시기 않았다. 술 마시러 갈 때 본 할매들의 잡다하고 음울한 사연들도 골목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한 사람이 길바닥에 말 그대로 큰댓자로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가로등에 비친 그의 얼굴은 구릿빛이었다. 사무실 노동자는 아닌 것이었다. 신발은 벗겨졌는지 벗었는지 모르게 발 언저리에 뒹굴고 있었다. 우리는 길게 생각할 것 없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아저씨! 일어나세요.”

 

하지만 그는 그날의 노동의 고단함 때문이었는지 신산스런 삶을 털어버리려 주량보다 더 마신 술 때문이었는지, 일어날 줄 몰랐다. 잠꼬대라고 할까 술주정이라고 할까, 웅얼거림만 있을 뿐이었다. 별 수 있나. 시원한 바람을 이불 삼아, 딱딱한 콘크리트를 담요 삼아 누웠는 그를 그냥 두고 가도 진짜 얼어죽진 않겠다 싶어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때다, “그냥 가면 어쩝니까?”라는 여자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삼현여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1m쯤 옆에 서 있었는데 우리는 그 학생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여튼 학생은 ‘사건의 현장’을 벗어나려는 우리를 매우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아니지, 째려보며 “이 사람을 그냥 두고 가면 어떡하느냐, 죽을지도 모른다, 무슨 사람이 그래요?” 이런 말들을 한 것 같다.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상황이었다.

 

“저는요, 제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 아저씨한테 전화기를 빌려서 신고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저씨들은 저 사람을 보고도 신고도 안하고 그냥 가려고 하세요?”라고 따지듯 묻는 그 여학생의 똑부러진 힐난에 우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우리가 취중이라 해도, 그 학생의 말은 골백번 곱씹어도 이치에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에 전화를 하고, 잠시 후 경찰이 오고, 그 경찰이 이젠 당신들은 할 일을 다 했으니 맡겨 놓고 가시라 할 때까지, 그 뒤에도,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서른 몇 살 즈음, 나는, 아파트 앞동에서 부부싸움 끝에 여자가 2층에서 뛰어내리며 내지른 비명소리를 듣고 플래시를 들고 나간 것은 물론 직접 119에 전화를 하던 사람이었다. 술 취한 사람이 자동차 안에서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드는 바람에 클랙슨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도, 그래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을 때 나는 직접 쫓아가 그 사람을 깨워 집으로 돌려보낸 적도 있다. 진짜. 그런데 10여 년 사이에 무엇이 변한 것일까. 저런 사람 잘못 건드리다 괜한 오해를 사거나 나쁜 놈으로 몰릴 수도 있겠다 싶은 계산이 앞선 것일까.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퉁이 내놔라고 하더란 속담을 과신한 탓일까. (201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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