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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앞산

by 이우기, yiwoogi 2012. 3. 16.

산은 높았다. 영원히 오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앞산은 고개를 한참 치켜들어야 꼭대기가 가늠될 정도였다. 앞산은 자두나무배나무감나무를 안고 있었고 자드락길 옆으로 무, 배추가 자라고 있었으며 개울 가까운 곳은 벼논이었다. 혀 놀림이 게으른 어른들은 앞산을 안산이라 했다. 마을 가운데 늘어선 아름드리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앞산을 올려다보던 나는 기가 질렸다. 고개가 아팠다. 나는 꼭 한 번 앞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을 뻔했다.

국민학교 건물은 1층짜리밖에 안 되었지만 그 지붕도 높기만 했다. 운동장 끝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교실 쪽을 바라보면 태극기 게양대까지가 눈높이였다. 지붕은 어떻게 생겼을까, 올라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앞산과 국민학교를 바라보며 집들이 옹기종기 대나무밭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고 어른들이 관앞들이라고 부르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넓이를 한눈에 넣을 수 없었다. 눈이 아팠다.

진주로 이사 오고 난 뒤 한 해에 서너 번씩 고향을 찾았다. 그때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토록 높아보이던 앞산은 나지막한 동산이었고 초등학교 건물은 형편없이 초라한 낡은 건물이었다. 관앞들은, 엄살을 좀 부리자면, 텃밭보다 조금 넓은 정도로 보였다. 아름드리 정자나무에 차를 갖다 대면 거추장스럽고 만만하게 보였다. 높고 큰 건물과 지리산 천왕봉에서 내려다본 세상을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교만해졌다.

사십 중반을 넘어서는 설날 아침, 앞산도 정자나무도 관앞들도 한눈에 들어오는 큰집 마루에서 나는 생각한다. 비록 높이는 지리산에 견줄 바 아니지만, 앞산은 수백 년 동안 고향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말없이 지켜보며 위로하고 쓰다듬고 껴안고 있다. 고향 농부들의 살림살이를 도왔고 집현산이 칠평산으로도 불리는 전설을 이야기해 준다. ‘숲골이던 동네 이름이 임곡으로 바뀐 이야기도 들려준다. 앞산의 이야기는 아기자기하고 조용조용했으나 그 호흡은 크고 깊었다. 한숨이었다.

요즘은 차를 타고 휙 지나가 버리지만,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60년 동안 이 동네 아이들을 키워냈다. 그중에 내로라할 만큼 난사람, 된사람, 든사람이 어찌 없을까. 모래바람 거세던 운동장엔 결 고운 천연 잔디가 깔렸고 후배들의 급식소는 칠평관이라 이름지었다. 학교 이름도 바뀌었고 2층으로 높아진 국민학교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자잘하고 긴 역사를 말하고 싶어 한다. 관앞들은, 지금은 새로 난 국도 때문에 동강나 버렸지만, 고향 사람들에게 먹을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주었다.

고향을 지키는 것이 어찌 사람뿐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의 눈을 뜬 것일까. 경남일보 2012.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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