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높았다. 영원히 오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앞산은 고개를 한참 치켜들어야 꼭대기가 가늠될 정도였다. 앞산은 자두나무ㆍ배나무ㆍ감나무를 안고 있었고 자드락길 옆으로 무, 배추가 자라고 있었으며 개울 가까운 곳은 벼논이었다. 혀 놀림이 게으른 어른들은 앞산을 ‘안산’이라 했다. 마을 가운데 늘어선 아름드리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앞산을 올려다보던 나는 기가 질렸다. 고개가 아팠다. 나는 꼭 한 번 앞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을 뻔했다.
국민학교 건물은 1층짜리밖에 안 되었지만 그 지붕도 높기만 했다. 운동장 끝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교실 쪽을 바라보면 태극기 게양대까지가 눈높이였다. 지붕은 어떻게 생겼을까, 올라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앞산과 국민학교를 바라보며 집들이 옹기종기 대나무밭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고 어른들이 ‘관앞들’이라고 부르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넓이를 한눈에 넣을 수 없었다. 눈이 아팠다.
진주로 이사 오고 난 뒤 한 해에 서너 번씩 고향을 찾았다. 그때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토록 높아보이던 앞산은 나지막한 동산이었고 초등학교 건물은 형편없이 초라한 낡은 건물이었다. 관앞들은, 엄살을 좀 부리자면, 텃밭보다 조금 넓은 정도로 보였다. 아름드리 정자나무에 차를 갖다 대면 거추장스럽고 만만하게 보였다. 높고 큰 건물과 지리산 천왕봉에서 내려다본 세상을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교만해졌다.
사십 중반을 넘어서는 설날 아침, 앞산도 정자나무도 관앞들도 한눈에 들어오는 큰집 마루에서 나는 생각한다. 비록 높이는 지리산에 견줄 바 아니지만, 앞산은 수백 년 동안 고향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말없이 지켜보며 위로하고 쓰다듬고 껴안고 있다. 고향 농부들의 살림살이를 도왔고 집현산이 ‘칠평산’으로도 불리는 전설을 이야기해 준다. ‘숲골’이던 동네 이름이 ‘임곡’으로 바뀐 이야기도 들려준다. 앞산의 이야기는 아기자기하고 조용조용했으나 그 호흡은 크고 깊었다. 한숨이었다.
요즘은 차를 타고 휙 지나가 버리지만,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60년 동안 이 동네 아이들을 키워냈다. 그중에 내로라할 만큼 난사람, 된사람, 든사람이 어찌 없을까. 모래바람 거세던 운동장엔 결 고운 천연 잔디가 깔렸고 후배들의 급식소는 ‘칠평관’이라 이름지었다. 학교 이름도 바뀌었고 2층으로 높아진 국민학교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자잘하고 긴 역사를 말하고 싶어 한다. 관앞들은, 지금은 새로 난 국도 때문에 동강나 버렸지만, 고향 사람들에게 먹을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주었다.
고향을 지키는 것이 어찌 사람뿐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의 눈을 뜬 것일까. 경남일보 2012.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