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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by 이우기, yiwoogi 2012. 3. 16.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겨울이 되면 눈을 보고 싶은가 보다. “우리 동네는 눈이 왜 안 오느냐?” 묻곤 한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눈을 많이 보기 때문일 것이다. 눈이 수북이 쌓인 스키장 같은 데를 쉽사리 데려갈 수도 없어 그냥 웃고 만다. 그러고는 눈이 자주 안 오는 게 다행이다.”는 말도 해준다. 어른으로서 아이의 꿈이나 상상력을 모른 체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정말 눈이 자주 안 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해마다 폭설이 내려 길이 끊기고 비닐하우스가 내려앉는 강원도를 보면서 내 기억은 어쩔 수 없이 군대시절로 돌아간다. 강원도 인제군 원통을 지나 민간인통제선 안쪽에 부대가 있었다. 19896월 입대했는데 첫눈을 1018일 오후에 만났다. 며칠 전까지 땡볕이 내리쬐던 날씨였는데 어느새 한겨울이었다. 부대원들은 이듬해 3월 말까지 눈과 싸웠다. 부대 앞 300m 남짓한 군사용 도로는 눈만 오면 밤새도록, 하루 종일 쓸었다. 그러고 나서도 무릎까지 쌓여 있는 연병장 눈은 주말 몫이다. 9월 한 달 동안 열심히 마련해 둔 싸리비와 넉가래가 남아나지 않았다. 1년의 절반을 눈과 전쟁을 한 셈이다. ‘지겹다는 말은 이때 쓰는 것이다.

진주에 눈이 조금이라도 와 얼어붙어 버리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눈길에 익숙지 않은 운전자들이 진땀을 빼고,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른다. 눈 내린 고속도로에서 추운 밤을 꼬박 새운 몇 해 전 명절 즈음의 이야기도 기억난다. ‘난리다라는 말은 이때 씀 직하다. 내 기억 속 눈은 부정적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동화에는 눈이 필수 배경이다.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에도 비보다는 눈이 더 잘 어울린다. 겨울밤 할머니와 구워먹는 밤, 고구마는, 창밖에 눈이 오고 있으면 더 따끈하고 고소해진다. 적당한 눈은 겨울가뭄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시금치나 마늘 같은 겨우살이 채소를 따뜻하게 덮어주기도 한다. 산에 쌓인 눈은 봄비가 올 때까지 조금씩 녹으면서 산짐승들이 마실 물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눈을 생각하다 보면, 무엇이든 적당해야 좋은 것이다 싶다. 똑같은 사물이나 상황이라도 경험과 생각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게 당연하다 싶다. 생각은 확장된다. 올 겨울에는 눈으로 인한 피해가 없었으면 싶다. 그래서 나도 아들과 함께 눈 덮인 산에라도 오르고 싶을 정도로 눈에 대한 편견을 이겨보고 싶다. 경남일보 201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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