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겨울이 되면 눈을 보고 싶은가 보다. “우리 동네는 눈이 왜 안 오느냐?” 묻곤 한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눈을 많이 보기 때문일 것이다. 눈이 수북이 쌓인 스키장 같은 데를 쉽사리 데려갈 수도 없어 그냥 웃고 만다. 그러고는 “눈이 자주 안 오는 게 다행이다.”는 말도 해준다. 어른으로서 아이의 꿈이나 상상력을 모른 체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정말 눈이 자주 안 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해마다 폭설이 내려 길이 끊기고 비닐하우스가 내려앉는 강원도를 보면서 내 기억은 어쩔 수 없이 군대시절로 돌아간다. 강원도 인제군 원통을 지나 민간인통제선 안쪽에 부대가 있었다. 1989년 6월 입대했는데 첫눈을 10월 18일 오후에 만났다. 며칠 전까지 땡볕이 내리쬐던 날씨였는데 어느새 한겨울이었다. 부대원들은 이듬해 3월 말까지 눈과 싸웠다. 부대 앞 300m 남짓한 군사용 도로는 눈만 오면 밤새도록, 하루 종일 쓸었다. 그러고 나서도 무릎까지 쌓여 있는 연병장 눈은 주말 몫이다. 9월 한 달 동안 열심히 마련해 둔 싸리비와 넉가래가 남아나지 않았다. 1년의 절반을 눈과 전쟁을 한 셈이다. ‘지겹다’는 말은 이때 쓰는 것이다.
진주에 눈이 조금이라도 와 얼어붙어 버리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눈길에 익숙지 않은 운전자들이 진땀을 빼고,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른다. 눈 내린 고속도로에서 추운 밤을 꼬박 새운 몇 해 전 명절 즈음의 이야기도 기억난다. ‘난리다’라는 말은 이때 씀 직하다. 내 기억 속 눈은 부정적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동화에는 눈이 필수 배경이다.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에도 비보다는 눈이 더 잘 어울린다. 겨울밤 할머니와 구워먹는 밤, 고구마는, 창밖에 눈이 오고 있으면 더 따끈하고 고소해진다. 적당한 눈은 겨울가뭄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시금치나 마늘 같은 겨우살이 채소를 따뜻하게 덮어주기도 한다. 산에 쌓인 눈은 봄비가 올 때까지 조금씩 녹으면서 산짐승들이 마실 물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눈을 생각하다 보면, 무엇이든 적당해야 좋은 것이다 싶다. 똑같은 사물이나 상황이라도 경험과 생각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게 당연하다 싶다. 생각은 확장된다. 올 겨울에는 눈으로 인한 피해가 없었으면 싶다. 그래서 나도 아들과 함께 눈 덮인 산에라도 오르고 싶을 정도로 눈에 대한 편견을 이겨보고 싶다. 경남일보 2012.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