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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즐거움

후불제 민주주의

by 이우기, yiwoogi 2009. 3. 17.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었다. 유시민의 책은, 그가 지식소매상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가진 것이라고는 여러 분야 연구자와 전문가들이 생산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 중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필요하고 또 가치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추려서 공급하는 능력밖에 없다”(357쪽)는 유시민의 이 말은 내가 보기에는 거짓말이다. 유시민은 스스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아주 많이 생산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거나 모두 그릇되게 말하고 있었지만 유시민은 비로소 말했거나 바르게 말하고 있으므로. 그런데도 유시민이 지식소매상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내가 보기에는 일반 시민들에게 필요하고 또 가치 있는 것들을 정리하여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 이 책의 앞 부분은 말 그대로 헌법 에세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한번쯤은 생각해 봤거나 읽어봤음 직한 내용들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있었던 것들의 총화라 할 수 있는 헌법. 그 헌법만 충실히 이행해도 되었을 우리들의 현대사. 그리고 2009년 3월 지금 겪고 있는 많은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은 헌법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이행하려 하지 않는 권력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다. ‘법치주의’를 ‘국민들이 법을 지켜야 한다’가 아니라 ‘대통령이나 권력기관이 법에 의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진지를 일깨워 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법치주의’라는 언뜻 무시무시한 무기를 휘두르는 현 정권은 헌법을 위배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 준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우리들의 권리, 권리, 또 우리들의 수많은 권리들과, 헌법에 명시된 권력자들의 의무, 의무 또 저들의 의무를 읽어나가다 보면 이렇게 잘못 끼워진 단추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다.

 

주로 자신의 정치적 이력을 따라가는 뒷부분은, 어떤 부분은 매우 공감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조금 공감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고개가 갸웃해진다. 그러나 대부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고, 유시민 한 사람이 정치인이 되고 국정을 논하는 위치에 오르고 또 나중에 실패하는 과정을 안타깝게 읽을 수 있었다. 유시민의 <대한민국 개조론>이 그가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시절 겪은 일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미래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그 부분을 포함하여 또 다른 우리나라 정권사를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이유라든가, 앞으로 이명박 정부가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이라든가 하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유시민의 평가가 후할 것이라는 점은 미리 예견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다소간 참을성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좀더 일찍 알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유시민의 이 책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지만 말할 수 없어서, 말해서는 안 되어서, 말하기 민망해서 일일이 거명하지 못하는 무수한 사례들이 숨겨져 있다. 과거 정부와 현 정부가 했거나 하고 있는 많은 정책과 오류들을 가차 없이 보여줄 듯하면서도 감추고 있는 부분이 많이 눈에 띈다. 그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역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런 것들은 좀더 세월이 지난 뒤에 좀더 객관적인 눈을 가진 역사가가 기록해야 할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마지막에 인용한 시(시라고 하기보다 조용한 격문이라고 할 수 있을)를 나도 인용하고 싶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민주의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체포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는

항의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수배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민단체 회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모차 엄마를 기소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촛불집회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전교조를 압수수색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시민들을 불태워 죽였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내 아들을 잡으러 왔을 때는

나와 함께 항의해줄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족이지만, 이 책은 내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많은 책 중 오자를 하나도 찾지 못한 책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것 같다. 출판사의 힘인지 유시민의 정성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부분에도 나는 놀라거나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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