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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즐거움

한국사傳을 다 읽고

by 이우기, yiwoogi 2009. 2. 1.

 

 

사람의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다. 소설은 소설로서 사람의 이야기인 만큼, 무척 재미있다. 그러나 한국사전과 같은 역사서는 더 재미있다. 실제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니까, 이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짜다 라는 긴장감이 백배 더한다. 5권을 숨차게 내리 읽었다. 조금 알던 이야기도 있고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람도 많다. 한권당 10명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으니 약 50명을 만난 셈이다. 이순신, 혜경궁 홍씨, 세종 등은 2-3번 언급되므로.

 

여자여서 불행했던 시인 허난설헌은 마음이 아프다. 광암 이벽은 안타깝다. 곽재우는 억울하다. 무왕 대무예와 문왕 대흠무는 자랑스럽다, 한없이. 정철은 징그럽다. 고등학교 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달달 외며 정말 존경했는데 존경심은 많이 없어지고 권력욕에 불타오르는 징그러운 사람 하나를 새로 만난 느낌이다.

 

광해군은 여전히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 조선 역사 중 가정법을 꼭 적용해 보고 싶은 임금이 광해이다. 만일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고 인조가 왕이 되지 않고 청나라가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그 이후 우리나라는 어찌 됐을까. 그래서 거꾸로 인조가 미워진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잘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좌에 앉은 것 아닌가 하는 단순논리로 자꾸 보게 된다. 광해는 다시 만나고 싶은 왕이다.

 

흥선대원군 이야기는 여전히 아리쏭하다. 자신의 의지와 외세의 간섭 속에서 아들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를 건너야했을까. 무너져가는 왕조를 바라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문을 꼭 걸어 잠그는 것뿐이었을까.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흥선대원군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한미 FTA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전혀 다른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눈물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 것이다.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들을 왕좌에 앉혀야 했으므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불쌍한 여인, 그러나 결국 승리하는 철의 여인이다.

 

홍역으로부터 조선을 구한 이헌길과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우리가 우리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해 준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로, 영화로 안 만들어진 것은 이상하다.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나는 간송 전형필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만 해도 한국사전 5권을 모두 읽은 보람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바람의 화원을 읽으면서 책 뒤에 소개돼 있는 그림의 출처, '간송미술관' 나는 이게 뭔지 잘 몰랐다. 아마, 아는 사람은 잘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통 모르는 미술관일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간송미술관을 검색해 보려 했는데 시간만 보냈다. 그러나 이제 알겠다. 재산 많은 사람이 조국과 역사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몸소 직접 보여준 많은 사람 중 간송이 맨 앞자리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수억, 수십억 비자금을 빼돌려 외국의 유명한 그림을 사들여 개인 창고에 보관했다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모 기업의 행태와 간송의 거룩한 행보는 얼마나 다른가. 쉰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게 너무 아쉬워, 나는 그 쉰일곱이라는 글자 밑에 밑줄을 그어놓고 눈시울을 붉혔다. 더 살았어야 했던 인물 간송 전형필. 그 분께 나는 감사한다.

 

장영실은 세종에 관한 책들을 읽을 때도 마지막 행적을 알 수 없었는데, 역시 찾을 수가 없나 보다. 안타깝다. 지금 우리가 세계 IT강국으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 광고처럼 우리가 빨리빨리를 외쳐대서가 아니라 장영실 같은 훌륭한 과학 선조가 있었던 덕분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세종이 꿈꾸었던 세상, 장영실이 이뤄간 세상, 그 바탕 위에서 우리는 과학을 이야기하고, BT, NT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간 이순신.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느낀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위대한 장군이면서 한 여자의 아들, 한 여자의 남편,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그가 짊어져야 했던 인생의 무게, 역사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불면으로 밤을 새고, 곽란으로 정신을 잃기까지 하면서, 부모와 아들의 죽음을 모른 체 전장에 나서야 했던 한 불행한 사나이의 흉리가 어떠했을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위대한 장수를 놓고 왕권을 위협할 것이라는 당치도 않는 논리로, 그를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가두고 죽이고 싶어한 선조여... 선조여, 조선의 양반이란 것, 조선의 사대부란 것, 조선의 조정이란 것이여, 그것의 허망함과 허무함이여. 그리하여 이순신은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忠과 孝를 가르치고 있다만, 그 안타까운 죽음에 이르러서는 정말 가슴만 먹먹할 뿐이다.

 

2009. 2. 1.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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