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문학 1993.10.15(제14호)_이야기 글_밭은기침 -이우기
밭은기침
원고와 교정지를 받아 든 현철의 손 끝이 파르르 떨린다. 시선을 사회부로 돌려 머리가 제법 벗겨진, 경찰출입 정 선배 모습을 찾느라 미간에 힘을 주니 잗주름이 슬며시 잡힌다.
이백 자 원고지 겨우 두 장. 글자 수로 따지면 사백 자, 그것도 띄어 쓴 칸을 제하면 삼백 자 될까말까 한 단신 한 꼭지.
괴발개발 갈겨 쓴 글씨임에도 '金ㅇㅇ씨(30.무직.ㅇㅇ시ㅇㅇ동)'이라 쓴 글이 너무나도 뚜렷이 눈에 박힌다. '億臺사기30代 구속令狀'이라 뽑힌 제목과 범인 이름 나이 주소가 매직으로 쓴 것보다 더 크게 확대되어 눈을 파고 든다.
그만한 기사면 사회면 2단 기사로는 실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더욱 문제는 원고와 교정지를 던져 주던 최 기자가 "별놈 다 보겠네"하며 그 기사 내용을 소문내어 버린 것이다.
"뭘 그리 열심히 보시나, 원골 외믄서 교열 볼라믄 이박삼일이 모자라지."
하며 어깨를 툭 치는 최 기자 목소리가 귓바퀴에서 돌개바람처럼 윙윙거린다. 최 기자는 현철의 고민을 알기라도 하듯 벙글벙글 웃으며 너스레를 뜬다.
"이 기자, 이런 사기꾼도 사회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현철의 심사를 긁어 놓자는 수작이다.
"누가 뭐라 했습니꺼, 괜히 옆에서 정신 헷갈리게 하지 마이소."
스스로도 목소리가 지나치게 컸다는 걸 느낄 정도로 현철은 긴장돼 있다. 열심히 교열보던 딴 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자기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아- 미안, 미안합니다. 아무 것도..."
하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은밀한 한 부분을 보여 준 것처럼 더욱 얼굴을 달아오르게 한다.
현철은 다른 원고부터 보기로 하고 그 사기사건 기사를 제친다. 평소 ㄷ과 ㄹ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악필이던 정 선배 글씨가 그날따라 한석봉 어머니 떡 썬 것 같이 가지런하게 된 것을 보면 중요한 기사니 빼지 말라는 암시가 묻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金이라 분명히 씐 성(姓)을 全으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민규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출근을 서두르던 오후 두 시쯤이었다.
"니 신문사 댕기모 연락 좀 하고 그래라, 자슥아."
"이 친구 보게, 낸들 니가 어데 있는지 우찌 알낀데."
첫 인사부터 그리 반갑지 않게 들리는 것이 예전 성격 그대로를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따지자면 현철은 그와는 말도 별로 안해 봤을 만큼 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재수한 걸 내세워 형 대접을 요구하기도 한 그였다. 물론 형 대접을 할 만큼 호락호락한 현철도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로 몇 분이 흐르자 웬만하면 꼭 한번 만나자는 얘기를 다짜고짜 꺼낸다. 시간이 없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보다 잠시라도 만나 그간 안부도 들어보고 그와 친했던 딴 친구들 소식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약속한 커피숍으로 향하는 몇 분 간 짧은 시간에도 현철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요구를 할 것인가,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부탁해 오면 어떤 말로 거부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나무말미에 내민 햇살이 그리 따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는 기자가 있음을 어떻게든 이용하려는 사람이 간혹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야- 너, 되게 출세했네. 하여튼 우리 동기 중에 니 같은 기자가 있다는 걸 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놈 상전 떠받들 듯 현철을 한참 추켜세우던 민규는, 묻지도 않고 제일 비싼 차로 두 잔 시켰다. 박봉인데다 월말이라 푼돈마저 금싸라기 같은 현철은 얼른 주머니속 현금을 가늠해 보았다.
"걱정마 임마, 내가 살게. 넌 예나 지금이나 그 널따라 이마만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있단 말야."
"내가 뭔 생각을 하는데, 제법 아는 양 떠들긴."
"딴 소리 마, 선무당 사람잡는 일은 없을 거니까. 그래 요새 살기가 좀 어떠냐, 사정이다 뭐다 해서 지방 신문사들이 영 애럽다고들 하던데."
"그저 그렇지 뭐. 그나저나 넌 어디서 숨어 살기에 그리 소식이 없냐? 이민이라도 간 줄 알았네."
조금 눅눅한 지하 커피숍에는 대낮인데도 손님은 만원이었다. 저마다 무슨 할 말들은 그리 많은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아르바이트 학생이 위태위태하게 차를 날라오자 이야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 사이에도 자기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민규의 시선을 슬쩍 외면하며, 이제 본론이 나올 것임을 현철은 직감하고 있었다. 현철의 마음을 정말 아는지 모르는지 민규는,
"어이, 아가씨 엉덩이 살이 많이 올랐네. 시집갈 때 되면 내한테 오라구."
딴청을 부리며, 차를 놓고 가는 학생 뒤통수를 억지로 간지럽혔다.
그러나 현철은 그런 농담을 하는 민규 목소리가 실끝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럴수록 현철은 변명거리를 더욱 긴박하게 구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 현철아, 아니지. 이 기자님. 실은 부탁말씀이 좀 있는데. 설마 이리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 청을 거절하진 않을 테고..."
차 대신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내뱉는 민규의 말을 하나하나 주워담으며 현철은 습관적으로 두 눈을 내리 감았다. 뭔지 모르지만 안 된다는 말을 쉽게 하기도 힘들 것이고 그러마고 했다간 낭패보기 십상일 것이다.
음악을 딴 걸로 바꾸느라 홀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현철은 꼴깍하며 침 삼키는 소리마저 동굴을 울리는 듯이 느껴졌다. 진짜 본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팽팽한 긴장은 차라리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한 마디씩 하는 민규의 '부탁말씀'은, 자기와 같이 사업하던 어떤 친구가 어쩌다가 사기죄로 몰려 경찰에 가게 되고 그게 신문에 실릴 게 뻔한데, 그 친구 사정상 기사가 신문에 나가면 좀 곤란한 일이 생기는데, 그래서 부탁하노니 그 기사를 좀 빼 주거나 이름만이라도 지워 달라며, 어찌 보면 어렵겠지만 또 어찌 보면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더 간단한 것이 아니냔 개소리괴소리였다.
사정은 잘 알겠지만, 아직 경력도 얼마 안 되고 또 기사를 빼거나 넣거나 하는 것은 교열과는 전혀 상관없으며 잘못 걸리는 날엔 자기 목도 보장받지 못하는 일인데다가 신문사가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라며 곤란하다고 현철이 주절주절 늘어놓자,
"사내새끼가 뭘 그리 쫀쫀하게 구냐, 씨발, 한번만 딱 한번만 눈감아 주면 되는 걸 가지고 기자라고 뻐기지 말고 사정 좀 봐 주라."
겉으론 태연한 척하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씨부렁댔지만 민규의 표정은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주먹다짐이나 드잡이질 당하기 좋을 만큼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 갔다.
"우리 오늘 기분도 삼삼한데 마치고 모꼬지 회동이나 한 번 할까?"
평소 부서 분위기를 잘 이끌던 조 기자가 업무파일작론(業務罷一酌論)을 오랜만에 들고 나왔다. 조 기자가 말하는 모꼬지회동이란 얼마 전부터 단골된 민속주점 이름 '모꼬지'에다 정치인들이 흔히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회동'을 더하여 만든 그들간 암호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
딴 기자들이 갹출을 하네, 선발대를 보내네 하며 들떠 있는데도 현철 손 끝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정 안되면 姓 金을 全이나 다른 성으로 바꿔 달라는데 그것마저도 못하겠다고 한다면 어찌 친구라 할 것이냔 민규 말에 쐐기를 박지 못한 것이 이만저만 후회되는 것이 아니다. 교열 보다 보면 실수로라도 한 자 정도는 틀리지 않느냔 말에 대꾸할 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삼십 행이 채 못 되는 기사엔 틀린 글자 한 자 없어 그냥 O.K.해버리면 그만인데 현철의 붉은 펜 끝은 金字 위에서 벌써 몇 십 분을 망설이고 있는지 모른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현철을 쳐다보는 기자마다 '저 친구 오늘따라 원고를 뭘 저리 오래 들고 있지'하며 시비를 걸어 올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비록 한 두자 틀릴 때 틀리더라도 교열 속도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현철이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기자, 얼른 마쳐야 텁텁한 막걸리라도 제법 폼 잡고 한 잔 걸칠 게 아닌가."
"예, 다 돼 갑니다. 글씨가 워낙 토룡체(土龍體)라서..."
"토룡이든 지렁이든 사기사건이면 빤한 걸 가지고, 그 원고 나온 지가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최 기자 말투는 여전히 현철의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한다.
'金모씨'라 해도, '全ㅇㅇ씨'라 해도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안다고 해도 실수였노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좋은 일을 한 사람이야 자기 이름이 틀리게 나가면 당장에 전화를 하겠지만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왜 자기 이름을 틀리게 썼냐고 항의 전화를 할 리 만무하다. 또 누군가 알아서 문제삼는다 하더라도 내일 하루만 지나면 그만 아닌가.
"이번 부탁만 들어주면 내 한 턱 낼게."
두 시간이나 씨룬 뒤에 커피숍을 나서면서 뒤통수에 대고 민규가 던진 마지막 말이다. 현철은 심한 모독감을 느꼈지만 참고, 출근 시각을 놓친 터라 서둘러 택시를 잡아 탔다.
열시다.
갑자기 속보로 날아오는 기사 말고 그 시각까지 원고를 들고 있으면 신문을 만들지 말자는 것과 같다고 늘 얘기하던 현철이다.
의표를 찌르는 듯한 최 기자 말과 술타령에 벌써 얼굴이 벌개진 조 기자 농담 시리즈가 현철 양쪽에서 왔다갔다 한다.
팩스용지를 자르지도 않고 기다랗게 늘어뜨린 채 통신실에서 뛰어나오는 외근 당직기자의 흥분한 목소리가 가을 하늘 금가듯 현철의 뒷골을 강타한 것은 바로 그때다.
"속보, 속보! 사기사건 공범이 잡혔다! 이건 최소한 중톱 감이야. 조간 특종이라구."
현철은 한 시간 남짓 씨름하던 교정지에 O.K.라 휘갈겨 쓰고는 전산실로 탁구공 받아 넘기듯 교정지를 넘긴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것은 긴장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숨을 크게 내쉬고 침을 삼켰으나 심한 갈증으로 밭은기침만 목울대를 따갑게 했다.
밭은기침
원고와 교정지를 받아 든 현철의 손 끝이 파르르 떨린다. 시선을 사회부로 돌려 머리가 제법 벗겨진, 경찰출입 정 선배 모습을 찾느라 미간에 힘을 주니 잗주름이 슬며시 잡힌다.
이백 자 원고지 겨우 두 장. 글자 수로 따지면 사백 자, 그것도 띄어 쓴 칸을 제하면 삼백 자 될까말까 한 단신 한 꼭지.
괴발개발 갈겨 쓴 글씨임에도 '金ㅇㅇ씨(30.무직.ㅇㅇ시ㅇㅇ동)'이라 쓴 글이 너무나도 뚜렷이 눈에 박힌다. '億臺사기30代 구속令狀'이라 뽑힌 제목과 범인 이름 나이 주소가 매직으로 쓴 것보다 더 크게 확대되어 눈을 파고 든다.
그만한 기사면 사회면 2단 기사로는 실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더욱 문제는 원고와 교정지를 던져 주던 최 기자가 "별놈 다 보겠네"하며 그 기사 내용을 소문내어 버린 것이다.
"뭘 그리 열심히 보시나, 원골 외믄서 교열 볼라믄 이박삼일이 모자라지."
하며 어깨를 툭 치는 최 기자 목소리가 귓바퀴에서 돌개바람처럼 윙윙거린다. 최 기자는 현철의 고민을 알기라도 하듯 벙글벙글 웃으며 너스레를 뜬다.
"이 기자, 이런 사기꾼도 사회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현철의 심사를 긁어 놓자는 수작이다.
"누가 뭐라 했습니꺼, 괜히 옆에서 정신 헷갈리게 하지 마이소."
스스로도 목소리가 지나치게 컸다는 걸 느낄 정도로 현철은 긴장돼 있다. 열심히 교열보던 딴 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자기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아- 미안, 미안합니다. 아무 것도..."
하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은밀한 한 부분을 보여 준 것처럼 더욱 얼굴을 달아오르게 한다.
현철은 다른 원고부터 보기로 하고 그 사기사건 기사를 제친다. 평소 ㄷ과 ㄹ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악필이던 정 선배 글씨가 그날따라 한석봉 어머니 떡 썬 것 같이 가지런하게 된 것을 보면 중요한 기사니 빼지 말라는 암시가 묻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金이라 분명히 씐 성(姓)을 全으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민규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출근을 서두르던 오후 두 시쯤이었다.
"니 신문사 댕기모 연락 좀 하고 그래라, 자슥아."
"이 친구 보게, 낸들 니가 어데 있는지 우찌 알낀데."
첫 인사부터 그리 반갑지 않게 들리는 것이 예전 성격 그대로를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따지자면 현철은 그와는 말도 별로 안해 봤을 만큼 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재수한 걸 내세워 형 대접을 요구하기도 한 그였다. 물론 형 대접을 할 만큼 호락호락한 현철도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로 몇 분이 흐르자 웬만하면 꼭 한번 만나자는 얘기를 다짜고짜 꺼낸다. 시간이 없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보다 잠시라도 만나 그간 안부도 들어보고 그와 친했던 딴 친구들 소식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약속한 커피숍으로 향하는 몇 분 간 짧은 시간에도 현철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요구를 할 것인가,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부탁해 오면 어떤 말로 거부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나무말미에 내민 햇살이 그리 따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는 기자가 있음을 어떻게든 이용하려는 사람이 간혹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야- 너, 되게 출세했네. 하여튼 우리 동기 중에 니 같은 기자가 있다는 걸 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놈 상전 떠받들 듯 현철을 한참 추켜세우던 민규는, 묻지도 않고 제일 비싼 차로 두 잔 시켰다. 박봉인데다 월말이라 푼돈마저 금싸라기 같은 현철은 얼른 주머니속 현금을 가늠해 보았다.
"걱정마 임마, 내가 살게. 넌 예나 지금이나 그 널따라 이마만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있단 말야."
"내가 뭔 생각을 하는데, 제법 아는 양 떠들긴."
"딴 소리 마, 선무당 사람잡는 일은 없을 거니까. 그래 요새 살기가 좀 어떠냐, 사정이다 뭐다 해서 지방 신문사들이 영 애럽다고들 하던데."
"그저 그렇지 뭐. 그나저나 넌 어디서 숨어 살기에 그리 소식이 없냐? 이민이라도 간 줄 알았네."
조금 눅눅한 지하 커피숍에는 대낮인데도 손님은 만원이었다. 저마다 무슨 할 말들은 그리 많은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아르바이트 학생이 위태위태하게 차를 날라오자 이야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 사이에도 자기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민규의 시선을 슬쩍 외면하며, 이제 본론이 나올 것임을 현철은 직감하고 있었다. 현철의 마음을 정말 아는지 모르는지 민규는,
"어이, 아가씨 엉덩이 살이 많이 올랐네. 시집갈 때 되면 내한테 오라구."
딴청을 부리며, 차를 놓고 가는 학생 뒤통수를 억지로 간지럽혔다.
그러나 현철은 그런 농담을 하는 민규 목소리가 실끝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럴수록 현철은 변명거리를 더욱 긴박하게 구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야, 현철아, 아니지. 이 기자님. 실은 부탁말씀이 좀 있는데. 설마 이리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 청을 거절하진 않을 테고..."
차 대신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내뱉는 민규의 말을 하나하나 주워담으며 현철은 습관적으로 두 눈을 내리 감았다. 뭔지 모르지만 안 된다는 말을 쉽게 하기도 힘들 것이고 그러마고 했다간 낭패보기 십상일 것이다.
음악을 딴 걸로 바꾸느라 홀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현철은 꼴깍하며 침 삼키는 소리마저 동굴을 울리는 듯이 느껴졌다. 진짜 본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팽팽한 긴장은 차라리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한 마디씩 하는 민규의 '부탁말씀'은, 자기와 같이 사업하던 어떤 친구가 어쩌다가 사기죄로 몰려 경찰에 가게 되고 그게 신문에 실릴 게 뻔한데, 그 친구 사정상 기사가 신문에 나가면 좀 곤란한 일이 생기는데, 그래서 부탁하노니 그 기사를 좀 빼 주거나 이름만이라도 지워 달라며, 어찌 보면 어렵겠지만 또 어찌 보면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더 간단한 것이 아니냔 개소리괴소리였다.
사정은 잘 알겠지만, 아직 경력도 얼마 안 되고 또 기사를 빼거나 넣거나 하는 것은 교열과는 전혀 상관없으며 잘못 걸리는 날엔 자기 목도 보장받지 못하는 일인데다가 신문사가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라며 곤란하다고 현철이 주절주절 늘어놓자,
"사내새끼가 뭘 그리 쫀쫀하게 구냐, 씨발, 한번만 딱 한번만 눈감아 주면 되는 걸 가지고 기자라고 뻐기지 말고 사정 좀 봐 주라."
겉으론 태연한 척하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씨부렁댔지만 민규의 표정은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주먹다짐이나 드잡이질 당하기 좋을 만큼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 갔다.
"우리 오늘 기분도 삼삼한데 마치고 모꼬지 회동이나 한 번 할까?"
평소 부서 분위기를 잘 이끌던 조 기자가 업무파일작론(業務罷一酌論)을 오랜만에 들고 나왔다. 조 기자가 말하는 모꼬지회동이란 얼마 전부터 단골된 민속주점 이름 '모꼬지'에다 정치인들이 흔히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회동'을 더하여 만든 그들간 암호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
딴 기자들이 갹출을 하네, 선발대를 보내네 하며 들떠 있는데도 현철 손 끝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정 안되면 姓 金을 全이나 다른 성으로 바꿔 달라는데 그것마저도 못하겠다고 한다면 어찌 친구라 할 것이냔 민규 말에 쐐기를 박지 못한 것이 이만저만 후회되는 것이 아니다. 교열 보다 보면 실수로라도 한 자 정도는 틀리지 않느냔 말에 대꾸할 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삼십 행이 채 못 되는 기사엔 틀린 글자 한 자 없어 그냥 O.K.해버리면 그만인데 현철의 붉은 펜 끝은 金字 위에서 벌써 몇 십 분을 망설이고 있는지 모른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현철을 쳐다보는 기자마다 '저 친구 오늘따라 원고를 뭘 저리 오래 들고 있지'하며 시비를 걸어 올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비록 한 두자 틀릴 때 틀리더라도 교열 속도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현철이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기자, 얼른 마쳐야 텁텁한 막걸리라도 제법 폼 잡고 한 잔 걸칠 게 아닌가."
"예, 다 돼 갑니다. 글씨가 워낙 토룡체(土龍體)라서..."
"토룡이든 지렁이든 사기사건이면 빤한 걸 가지고, 그 원고 나온 지가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최 기자 말투는 여전히 현철의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한다.
'金모씨'라 해도, '全ㅇㅇ씨'라 해도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안다고 해도 실수였노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좋은 일을 한 사람이야 자기 이름이 틀리게 나가면 당장에 전화를 하겠지만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왜 자기 이름을 틀리게 썼냐고 항의 전화를 할 리 만무하다. 또 누군가 알아서 문제삼는다 하더라도 내일 하루만 지나면 그만 아닌가.
"이번 부탁만 들어주면 내 한 턱 낼게."
두 시간이나 씨룬 뒤에 커피숍을 나서면서 뒤통수에 대고 민규가 던진 마지막 말이다. 현철은 심한 모독감을 느꼈지만 참고, 출근 시각을 놓친 터라 서둘러 택시를 잡아 탔다.
열시다.
갑자기 속보로 날아오는 기사 말고 그 시각까지 원고를 들고 있으면 신문을 만들지 말자는 것과 같다고 늘 얘기하던 현철이다.
의표를 찌르는 듯한 최 기자 말과 술타령에 벌써 얼굴이 벌개진 조 기자 농담 시리즈가 현철 양쪽에서 왔다갔다 한다.
팩스용지를 자르지도 않고 기다랗게 늘어뜨린 채 통신실에서 뛰어나오는 외근 당직기자의 흥분한 목소리가 가을 하늘 금가듯 현철의 뒷골을 강타한 것은 바로 그때다.
"속보, 속보! 사기사건 공범이 잡혔다! 이건 최소한 중톱 감이야. 조간 특종이라구."
현철은 한 시간 남짓 씨름하던 교정지에 O.K.라 휘갈겨 쓰고는 전산실로 탁구공 받아 넘기듯 교정지를 넘긴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것은 긴장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숨을 크게 내쉬고 침을 삼켰으나 심한 갈증으로 밭은기침만 목울대를 따갑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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