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이야기>
100살 할머니가 있다. 99살 이웃 할머니, 98살 이웃 할아버지와 게이트볼 경기를 하면서 건강하고 즐겁게 산다. 이 할머니의 인생은 평범하지 않다. 딸은 바닷가에 사는 우직한 남자 김우재에게 시집갔다. 둘은 금슬이 좋았다. 행복했다. 사위는 딸에게 갯가 일을 시키지 않았다. 딸은 생선 다듬는 것조차 할 줄 몰랐다. 몰라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마냥 행복했다. 딸은 3남 2녀를 낳았다. 사위는 장모에게 돈을 빌려 배를 샀다. 만선의 꿈을 꾸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혔다. 사위는 죽었다. 딸은 불행에 빠졌다.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지만 100살 할머니는 이웃과 함께 건강하게 살아간다. 금서댁이다.
금서댁의 딸 이름은 정귀래이다. 올망졸망 다섯 아이를 남겨놓고 남편은 하늘로 갔다. 아니,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막막하고 막연한 인생이다. 생선 비늘 치는 것조차 할 줄 모르는 이 가련한 귀래는 굶어 죽을 처지에 놓였다. 이웃 상인들이 생선 다듬는 것을 가르쳐 준다.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대로 굶어 죽어 버리거나 아이들과 함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버려야지라는 생각도 했을 법하다. 하지만 억척같이 이겨냈다. 살아냈다. 큰아들은 사업하고 둘째아들은 대기업에 들어갔다. 나이 들어서도 자식들 용돈을 보내주고 손자가 좋아한다는 김치도 담가준다. 귀래 자기는 몸이 아파도 병원 갈 생각을 하지 않지만 아들을 위한 보약을 짓고 아들이 좋아하는 고들빼기김치를 담근다. 그것이 재미이고 행복이고 휴식이다. 상가 번영회에서 주말에 등산을 가자고 제안해도 거절한다. 앞치마 주머니엔 늘 약이 들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한다. 몸속의 5장이 지르는 비명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결국 몸에 이상이 생긴다. 모든 걸 내려놓고 찾아간 곳은 어디일까.
그 정귀래의 둘째아들은 영철이다. 공부를 잘했다. 대기업에 취업했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해야 할 일은 만만치 않았다. 대기업에 사표를 내고 안식과 휴식을 찾아 인도를 간다. 어머니가 좋아할 스카프를 사 보낸다. 어머니께 사직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다. 그는 어머니의 자랑이었으니까. 그는 어머니의 자존심이었으니까. 그는 끊임없이 귀향, 귀촌을 꿈꾸었다. 틈틈이 고향을 찾아 땅을 사고 집을 지었다. 찔레꽃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드디어 쓰러진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에서 실토한다. 그렇게 살다간 죽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고 외친다. 꽉 짜인 일정과 실적표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노라고 하소연한다. 자기 때문에 형이 대학을 포기한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 몸과 내 마음이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환청으로 들렸노라고, 그래서 대기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절절히 외친다.
100살 할머니 금서댁, 75살쯤 되었을 정귀래, 50살쯤 되었을 김영철 3대의 이야기는 마음 푹 내려놓고 편안하게 앉아서 듣거나 볼 수 없는 이야기다. 금서댁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먹고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한국전쟁 즈음 태어났을 귀래도 먹고사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자 목표였을 것이다. 다섯 자녀를 모두 똑같이 교육할 수 없었을 세대이다. 목숨 부지하는 게 삶의 지향점이던 시절이다. 형제 중 하나는 사업을 하고 하나는 농사를 짓고 하나는 대도시 공장으로 가고, 그러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산업이 한창 성장할 70년대에 태어났을 영철도 자기 앞에 놓인 과제는 가족 부양이었다. 3대의 삶은 그렇게 하나의 줄기로 이어져 있다.
극단 큰들의 마당극 <찔레꽃>은 100살 할머니 금서댁과, 금서댁의 딸 귀래와, 그 귀래의 아들 영철의 이야기다.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이를 알 수 있는 사람은 금서댁뿐이다. 현재 100살이면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금서댁의 딸(정귀래)이면 한국전쟁 즈음 태어났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고, 그 딸의 아들, 즉 금서댁의 손자(김영철과 형제들)는 70년대에 태어났다는 가정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마당극 작품 속에서 귀래의 다섯 아이들은 1990년대나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 같다.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인스타그램에 영상과 사진을 공유한다. 이렇게 나이를 계산해 보는 것은, 나 같은 사람이 할 일이 없어서 억지로 맞춰 보는 것이고, 실제 작품에서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든 3대 모두 결코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살아간다. 100살 할머니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참으로 오랜만에 친정을 찾아온 딸이 엄마의 따뜻한 방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금서댁은 귀래를 깨우지 않고 푹 자도록 내버려 둔다. 그런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법이다. 몸 속 5장(간장, 폐장, 비장, 신장, 심장)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은 귀래는 마침내 영혼의 안식처로 찾아간다. 친정이다. 영철이 꾸며놓은 자그마한 시골집을 보면서 “평생 이런 집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다.”라고 말한다. 애써 억눌러온 심리적·정서적 안식을 마침내 얻게 된다. 영철은 회사 조직의 압박과 어머니, 형제들을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하는 대기업이라는 일자리를 과감하게 포기한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찾아간다.
<찔레꽃>을 보면서 몇 가지를 느낀다. 정귀래의 삶은 우리 어머니의 삶과 너무나 똑같다. 심지어 주인공 귀래가 입은 윗도리 조끼도 어머니가 입던 옷과 닮았다. 뽀글뽀글 파마머리도 그렇다. “너거가 하면 맛이 있나? 내가 해야 맛이 있지.”라는 대사도 똑같다. 병원 가자고 하면 “나는 먹는 기(약) 있다.”라는 말도 닮았다. 고들빼기김치 담가 놨으니 퇴근길에 집에 들러 갖고 가라는 전화는 지금도 걸려올 듯하다. 우리에게 어머니가 필요했듯이 어머니에게도 어머니가 필요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외할머니는 오래전 돌아가셨는데, 그때 어머니의 상실감을 나는 크게 생각지 못했다. 미안하고 미안한 일이다.
누구든 내 몸과 내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내 몸의 작은 이상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 마음과 정신에 여유를 주어야 하고 휴식을 주어야 한다. 앞만 바라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삶이 윤택해지고 여유로워진다.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고 아웅다웅 바둥바둥 살지 말아야 한다. 마당극을 보면서 평범하면서도 어렵고, 어렵지만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가족을 돌아본다. 주위 사람들의, 겉으로 보이는 표정 이면의 그 무엇을 상상하며 그들 삶을 응원하곤 한다.
<찔레꽃> 출연 배우들의 연기 호흡을 본다. 입단한 지 몇 해 되지 않은 젊은 배우들이 회를 거듭할수록 더 진지하게 열심히 연기하는 것을 본다. 한의원, 병원, 시장, 인도, 게이트볼장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는 대배우들의 농익은 연기도 본다. 이들의 연기호흡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무대에서 실제 연기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어떤 때는 촬영해 놓은 필름을 돌리는 것 아닌가 착각한다. 그만큼 빈틈없이 정교하게 돌아간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보는 이 <찔레꽃>은 어제 본 작품과 과연 같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새롭게 다가온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바뀌는 대사를 나중에야 알게 된다. 큰들은 작품 한 편을 창작하면 열 번, 백 번 공연하면서 매번 조금씩 조금씩 고쳐 나간다. 그런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창작하는 사람의 바람직한 태도를 배운다. 이 외에도 참 많은 것을 알게 해주고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다. ‘명작’이란 이런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큰들에 ‘명품극단’이라는 이름을 붙여줘야겠다.
비 오는 어린이날인 5월 5일 산청군 금서면 동의보감촌 주제관에서 열린 극단 큰들의 마당극 <찔레꽃>을 관람했다. 공식적으로는 2021년에 창작했는데 내가 처음 본 건 2022년 6월경이었고 이날 공연은 48번째이다. 47번째이던 5월 4일엔 동의보감촌 잔디마당 야외에서 공연했다. 나는 혼자 울며 웃으며 보았다. 비 때문에 실내에서 공연한 이날 공연은 큰형님 가족과 넷이서 보았다. 큰형님도 큰들 후원회원이다. 이틀 연속 <찔레꽃>을 관람했다. 2022년에 일곱 번 보았고 2023년에 여덟 번 보았다. 올해는 두 번 보았다.
5월 6일 저녁 6시에 진주성에서도 볼 수 있고, 5월 16일 저녁 7시에 산청문화예술회관에서도 볼 기회가 있다. 동의보감촌에서는 5월 18일(토), 19일(일)과 6월 8일(토), 9일(일)에도 공연한다. 올해만 6번 더 관람할 기회가 있다. 얼마나 고마운지….
2024. 5. 5.(일)
이우기 씀
아래 글은 5월 4일 관람 후 쓴 짧은 후기입니다.
<마당극 찔레꽃>
잘 보았습니다. 눈물 좀 났습니다. 많이 웃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관객들이 콧물을 훌쩍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젊은 귀래가 생선 장사를 배우는 장면입니다. 저는 그보다 훨씬 앞부분에서 눈물이 핑 돕니다. 고들빼기 김치가 등장하면, 저는 눈앞이 뿌얘집니다. 극이 중반을 넘어설 무렵부터 앞쪽 뒤쪽 양옆에서 눈물 닦고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립니다. <찔레꽃>은 그런 작품입니다.
웃기는 게 주특기인 극단 큰들이 사람 울리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런 한편, 시종일관 재미있게 웃으면서 감상하는 분도 많습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오밀조밀 잘 짜맞춘 연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1시간 동안 넋놓고 경계를 풀어, 푹 빠져들며 마음이 따뜻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합니다. <찔레꽃>은 그런 작품입니다.
2024. 5. 4.(토)
ㅇㅇㄱ
극단 큰들 <찔레꽃>(5월) 공연 일정
❶ 5월 04일(토) 14:00 산청 동의보감촌 잔디마당(무료)
❷ 5월 05일(일) 14:00 산청 동의보감촌 잔디마당(무료)
❸ 5월 06일(월) 18:40 진주성 특설무대(무료, 논개제 기간에는 진주성 무료 입장)
❹ 5월 16일(목) 19:00 산청 문화예술회관(무료, 예약 필수, 지정좌석제)
❺ 5월 18일(토) 14:00 산청 동의보감촌 잔디마당(무료)
❻ 5월 19일(일) 14:00 산청 동의보감촌 잔디마당(무료)
날씨와 사정에 따라 공연 일정과 작품은 변경될 수도 있다. 애매하거나 궁금하면 공연장 가기 전에 확인 전화를 해도 된다. ☎ 055-852-6507(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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