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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큰들 마당극 보러 가기

마당극 보는 재미

by 이우기, yiwoogi 2023. 6. 18.

<마당극 보는 재미>

 

평사리 들녘이 보이고 부부송도 보이고 멀리 섬진강 모래도 보인다. 날씨가 더웠고 옅은 안개가 끼었다. 바람은 조금씩 불었다.

 

토요일 오전에 사무실 나와 밀린 일을 후다닥 하다가, 그래도 못다 한 일은 미뤄두고 11시 20분쯤 길을 나섰다. 뜨거운 자동차를 식혀 가며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에 이르렀다. 전국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들었다. 상평마을 들머리 ‘솔향’에서 간장국수를 먹고 싶었는데 손님이 너무 많았다. ‘부부송식당’에서 밀면을 먹었다. 돈은 큰들 마당극 보러 가신 진주큰들풍물단원 부부가 내셨다. 마당극 공연장에서 가장 자주 뵌 분들이다.

 

평사리에는 여름 꽃이 관광객의 눈길을 시원하게 해 준다.

 

공연장 올라가는 길에 냉동 오미자와 냉동 식혜를 팔기에 식혜를 10병 샀다. 한 병에 2000원이다. ‘꽁꽁 얼려 놓았는데도 2000원밖에 안 하다니’라고 생각하며. 폭염 속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에게 주려고 산 것이다. 공연 마친 뒤 한 모금씩이라도 하시라는 뜻이다. 주차장에서 공연장 올라가니 등줄기와 콧잔등에 땀이 줄줄 흐른다. 골목골목을 알록달록 예쁘게 디자인하는 꽃들을 감상하는 재미 덕분에 힘든 줄은 몰랐다.

 

배우들은 분장을 하고 연습(리허설)을 한다. 연습은 호흡 잘 맞추는 게 중요한 대목, 지난 공연에서 조금 바뀐 부분만 하는 것 같다. 연습 장면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웃긴다. 연습 마친 뒤 젊은 여배우가 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 한 분이 말한다. “아이고, 차암 예쁘다.” 부부가 일찌감치 명당에 앉았는데, 시종일관 마당극에 푹 빠졌다. 간간이 “참 잘한다”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다.

 

일본 앞잡이 조준구가 임이네의 발길질에 꼬꾸라진다. 통쾌한 장면이다.

 

날씨 탓인지 관객이 적다. 최참판댁 안채 마당에도 천막을 쳤다. 의자도 놓았다. 큰들은 관객 편의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관객의 재미도 가장 먼저 생각한다. 관객은 그늘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배우들은 땡볕에서 햇빛을 마주 보며 공연한다. 뛰고 구르고 달리고 넘어진다. 관객이 제법 여럿 모였다. 여느 때 같으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들어차는 공연장이다. 담벼락 너머에서 고개만 빼곡 내밀어서 보는 곳이다. 이날은 조금 널널했다. 이런 날도 있다.

 

조준구와 홍씨가 등장하고 서희가 쫓겨가고 길상이 최참판댁 재산을 되찾는다. 10년 만에 간도에서 귀국한 서희는 혼례를 올린다. 어김없이 머슴 기타등등이 어느새 새신랑이 되어 등장한다(이런 표현은 마당극을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 새신랑이 어디에서 좀 놀아본 분 같다. 시키는 대로만 고분고분하지 않다. 나중에 등등동지가 되었을 때는 한 수 더 떤다. 권총은 한 자루만 준비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쌍권총을 뽑아 든다. 기념으로 악양막걸리를 받아 들고는 “꼭 집에 가서 마시겠소. 음주운전은 하지 않겠소”라고까지 너스레를 떤다. 덕분에 배꼽이 빠지라고 웃었다. 이런 장면은 공연마다 다르다. 등등동지가 어떤 분이 되느냐에 따라 재미는 크게 달라진다. 이날 공연은 만점이다.

 

광복이다. 대한독립만세다. 오른쪽 검정색 옷 입은 분이 이날 등등동지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일본군과 조준구가 길상을 붙잡았다. 젊은 조선 처녀를 잡아간다. 길상도 잡혀가고 어린 임이도 붙들려 간다. “엄마, 엄마아”라고 애달프게 부르짖는 임이의 목소리는 심장을 후벼 판다. 어지럽다. 울 밑에 선 봉선화는 조선이요, 길상이요, 임이다. 그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날에 아름답게 꽃필 날이 있음을 알았기에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버티고 이겨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시리고 아프고 슬펐다. 끌려가는 임이의 눈빛과 목소리는 가장 외면하고 싶은 장면이자 두 눈 가장 크게 뜨고 직시해야 할 장면이다. 내가 꼽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일본 국왕이 핵폭탄주를 원샷으로 들이켜고 항복했다. 일본으로 데려가 달라는 조준구를 뿌리치고 일본 장교는 달아난다. 하동 사람이 들어와서 일본 앞잡이를 응징한다. 임이네의 통쾌한 발길질에 조준구는 나동그라진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다. 내가 꼽는 명장면이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조준구와, 동료의 도움으로 공중부양한 임이네가 발을 쭉 뻗는 것과, 화면에는 안 보이지만 적절한 효과음을 터뜨려주는 악사의 호흡이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는다. 관객들은 와~하며 박수를 친다. 관객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광복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랐던 임이가 돌아오고 길상도 돌아온다. 광복은 눈앞에서 사라진 것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옴이다. 일제강점기가 있기 이전으로 돌아감이다. <최참판댁 경사 났네> 216회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공연 끝난 뒤 배우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단 한 명에게도 멋진 사진을 선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큰들이 고맙다.

 

이로써 올해 상반기 마당극 공연은 거의 마무리됐다. 극단 큰들, 고생 많이 하셨다. 유난히 날씨 운이 따라주지 않던 2023년의 절반이 지나간다. 더운 여름날 건강 잘 다스리길 빈다. 마당극 한 편이 끝나면 좀 허전해지지만 다음 공연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모든 걸 참을 수 있다. 6월 20일 산청문화예술회관에서 <찔레꽃>이 기다리고 있다. 7월 22일 나주에서 열리는 민족극 한마당에서도 뵙기를 기대한다. 산청에서 8월 4-5일 저녁엔 <남명>으로 만나기를 기다린다. 산청 엑스포 기간에 이어질 많은 공연 중에 3분의 1이라도 찾아가 볼 수 있기를 빌어 본다.

 

올해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10번 보았다. <최참판댁 경사 났네> 2번, <남명> 2번, <효자전> 2번, <찔레꽃> 2번, <오작교 아리랑> 2번이다. 사이 좋게 2번씩이다. 6월 20일 <찔레꽃>을 합하면 11번이 되겠다. 올 가을에는 <효자전> 300회 공연을 만날 듯하고 <목화>도 본격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8월에는 새 작품도 선보인다고 하여 기대가 가득 찼다. 큰들 마당극 보는 재미는 조금도 삭아지지 않고 줄어들지 않고 바래지 않는다. 희한하게 기쁜 일 아닌가.

 

2023. 6. 18.(일)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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