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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어떤 하루

by 이우기, yiwoogi 2021. 1. 14.

날이 조금 풀렸다. 이제 혹독한 추위는 없을 듯하다. 새벽 출근길이 훨씬 나을 뻔했다. 오늘은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았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사무실 인원 가운데 하루에 한 명은 재택근무를 해야 한다. 오늘은 내 차례였다. 7시도 되기 전에 컴퓨터를 켜고 회사 내부 사이트에 접속하여 ‘출근’을 눌렀다. 매일 아침 8시까지 그날 언론보도를 갈무리하여 카카오톡으로 보고하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택근무라 머리를 감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거실에서 바라본 창밖은 포근해 보였고 거실로 침범한 햇살은 따스했다.

 

그리고, 오늘은 무척 바쁜 날이었다. 비공식적 짧은 보고서를 완성하여 제출했다. 외부 기관과 업무 협의를 진행하느라 주고받은 전화는 40회 가량 된다. 사무실 내 자리로 걸려오는 전화를 휴대폰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에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휴대폰으로 바로 걸려오는 전화인지 사무실을 거쳐 돌아오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부탁과 협조 요청이 뒤엉겼고 질문과 답변은 어지러웠다. 전쟁 같다고 하면 좀 지나친 듯하고 난리법석쯤은 되는 하루였다. 목구멍에서 단내가 났다.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눈 건 셀 수조차 없다. 카카오톡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 많은 대화와 보고와 지시들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내 의견을 보내고 상대방 이야기를 듣고 필요한 문서와 사진을 순식간에 한 명에게, 또는 여러 명에게 보내는 카카오톡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재택근무는 가능했을까. 밤 9시가 지난 시각에도 카카오톡은 울린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 오는 친구도 있고 꽤 진지한 주제를 단체방에서 주고받기도 한다. 대화에 참견할 때도 있지만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때도 있다. 침묵하며 혼자 빙그레 웃는 것도 대화이다.

 

재택근무할 때는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 동네 짜장면 집에도 가면 안 된다. 점심은 라면으로 때웠다. 달걀을 두 개 넣었다. 익은 배추김치를 많이 먹었다. 엊저녁 마신 소주가 풀어졌다. 팅팅 불어난 라면 덕분에 오후 내도록 배는 고프지 않았다. 짜게 먹은 탓인지 연신 물을 들이켰다. 배는 더 불렀다. 저녁은, 퇴근하여 오는 아내를 위해 내가 차렸다. 근본도 없고 조리법도 없는 돼지고기찌개를 끓였다. 올챙이배가 되었다. 여전히 목은 마르고 배는 부르다. 이러다가 밤새도록 못 자겠다.

 

저녁엔 아들에게서 카카오톡 문자가 왔다. 피해복구훈련을 마친 뒤 집으로 택배를 보냈단다. 이모, 숙모, 큰어머니 등 주로 여성들께 보낼 화장품을 비엑스(BX)에서 샀단다. 달팽이크림이라나 뭐라나. 착하기도 하지. 국방부에서 모든 군인에게 지급한 상품권으로 아버지 책을 두 권 사서 보낸단다. 아이고, 착하기도 하지. 비엑스에서 자주 사 먹던 맛있는 쌀국수도 보낸단다. 아버지가 국수 좋아하는 것은 알아가지고. 착하기도 하지. 아내는 이런저런 것 사느라 용돈 모자라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나중에 필요하면 이야기한단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아들을 군대 보낸 것 같지도 않다. 하루 동안 벌어진 온갖 가지 일들이 눈 녹듯이 사그라진다. 아들의 문자는 음성서비스가 지원되는 것 같다. 마치 곁에 서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진주와 사천이 가까워서 그런가 보다 여긴다.

 

2021. 1. 14.(목)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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