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내가 나온 고등학교에서는 <대아고등학교 50년사>를 발간했다. 나는 집필위원으로 참가하여 2년 남짓 기간 동안 여러 회의에 참가하고 직접 원고를 작성하기도 했다. 함께 집필위원으로 참가한 강동욱 선배(전 경남일보 문화부장)는 대아고 창설기부터 대략 1980년대까지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그 이후의 일들은 내가 갈무리했다. 일생에 다시 없을 기회였고, 그동안 많은 애착과 긍지를 갖고 있던 모교 사랑을 조금이라도 풀어놓을 기회였다.
극단 큰들의 2018년 새 마당극 <남명>을 이야기하면서 왜 뜬금없이 출신 고등학교 이야기부터 꺼내는가. <대아고등학교 50년사>에 현재의 ‘남명선비문화축제’의 전신인 ‘남명제’가 처음 창설되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대아고등학교는 오래 전부터 남명의 ‘경의사상’을 교육 이념의 하나로 채택하여 다양한 방향으로 교육해 왔다는 사실이 이 50년사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극단 큰들은 마당극 <남명>을 2018년 10월 20일 제42회 남명선비문화축제 기간에 산청군 시천면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야외공연장에서 처음 공연했다. 남명선비문화축제가 41년 전에 창설됐다는 이야기다. 처음 창설될 때의 명칭은 ‘남명제’였다. 1977년 8월 10일 산청군 시천면 덕천서원에서 제1회 남명제가 열렸는데, 남명사상 학술강연회와 남명 선생 475주년 탄신추모제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아고등학교 박종한(朴鐘漢) 교장선생은 남명사상을 진주정신의 표상으로 삼고 재조명 운동을 맨 처음 시작했다. 첫 행사의 주최는 남명 조식 선생 제전위원회가 맡았고 주관은 덕천서원과 두류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맡았는데 이 두류문화연구소는 대아고등학교 안에 있는 연구소였다.
박종한 교장선생은 ‘남명제 창설 취지문’에서 “(남명은) 의(義)를 보고 행하지 않는 위선을 타기하고 진정한 선비상을 지행일치에서 추구한 위대한 철학자였다. 국사의 난맥을 보고는 죽음에 맞서 탄핵하고 나선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는 선생의 이러한 신념을 행동으로 표시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제3회 남명제까지는 두류문화연구소(즉 대아고)가 주관하고 제4회 행사 때부터는 남명 정신의 확산을 위해 경남사립중고등학교장회에서 맡아 진행했다고 씌어 있다. 2001년 남명 탄신 500주년을 맞아 ‘선비문화축제’로 확대 개편됐고 2005년부터는 ‘남명선비문화축제’로 명칭이 변경되어 산청군에서 맡아 행사를 치르고 있다.
50년사에서는 “남명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 대아고등학교에서는 이미 남명 선생의 정신에 대한 실천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남명의 경의(敬義) 정신이 올바른 사학의 건학 정신에 심어져야 한다고 보고, 남명을 연구하여 학생 교육에 접목시키고 남명학 연구를 위해 1978년 <남명집>을 발간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박종한 교장선생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도교육(茶道敎育)을 할 때 ‘경의잔(敬義盞)’을 직접 제작하여 교육에 임했으며 현직에서 물러났을 때에도 경의잔을 제작, 보급하였다. 대아고등학교 교정에는 남명정신의 핵심인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귀가 새겨진, 칼처럼 생긴 자연석 빗돌이 있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라 하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을 의라고 한다’는 뜻이다. 글씨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서예가 가운데 한 분인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선생이 썼다고 한다.
극단 큰들이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의 일대기와 사상을 다룬 마당극 <남명>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맨 처음 남명제를 창설하고, 남명정신을 우리나라 사학의 건학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셨던 아인 박종한 교장선생은 저승에서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었다. 남명선비문화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소 같은 연구 기관이 생겨난 것도 어쩌면 41년 전 박종한 교장선생의 노력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경남을 대표하는 거점 국립대학교이자 현재 나의 일터인 경상대학교에는 남명학관이 있다. 남명학관은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기리고, 남명학을 중심으로 한국학 및 인문사회과학 연구의 본산이 되기 위해 건립됐다. 남명학관은 1993년 6월 남명학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 완공 후 경상대학교에 기증하기로 하여, 김장하(남성당한약방) 선생과 박유정(한보종합건설) 사장이 건립후원을 약정하였다. 남명학관은 건립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결국 남명 탄신 500주년이던 2001년 10월 23일 개관했다.
남명학관 안에는 남명 조식 선생 전시관이 있다. 산청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 기념관에 견줄 바 아니지만, 남명 선생의 일대기와 사상, 후학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뜻깊은 기념관이다. 또한 경상대학교에는 남명학연구소가 있다. 남명학연구소는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사상뿐만 아니라 제자들(남명학파)의 학문과 사상, 일대기 등을 연구하며 21세기도 남명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대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나로서는 마당극 <남명>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남명 선생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 없다. 선생과 관련한 여러 책을 섭렵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남명에 대하여 이야기할 자신은 없다. 그래서 마당극을 통해서라도 남명 선생을 좀 배워보자고 생각했다. <오작교 아리랑>, <효자전>, <최참판댁 경사 났네> 세 편의 마당극을 서른 번 넘게 본, 큰들의 후원회원으로서 과연 <남명>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지 기대하는 마음이 지리산만큼 컸더랬다. 큰들이 <남명>을 만든다는 ‘소문’을 6월쯤 들은 듯한데,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드디어 10월 20일 첫 공연 날짜가 다가온 것이다.
10월 20일 첫 공연을 보았다. 손뼉 소리가 천왕봉을 흔들고 덕천강을 춤추게 했다. 함께한 모든 이들이 크게 만족했다. 보통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들 하는데 큰들은 관객들의 기대 수준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선사했다. 깨알같다고 할지 완벽하다고 할지, 소품 하나에서부터 대사, 몸동작, 음악들까지 보여줄 수 있는 걸 거의 모두 보여준 듯했다. 특히 무대장치는 눈여겨볼 만했다. 정면에 쓰여 있는 ‘경의(敬義)’라는 글귀는 극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관객을 바라보며 마당극 <남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되풀이하여 들려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궁금한 건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철학)을 어떻게 쉽고도 간결하게 보여줄까 하는 것이었다.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해 한두 번 들어보지 아니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경의사상(敬義思想)’에 대해 들어보았다고 해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것을 1시간 짜리 마당극을 통하여 어떻게, 얼마나 잘 드러내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게 가장 궁금하고 기대되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11월 11일 오후 1시 산청 동의보감촌에서 두 번째 공연을 보았다. 몸이 좀 찌뿌드드하여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망설여지던 주말이었다. 토, 일요일 오전엔 사무실 나가서 일을 보았다. 다행히 걸을 만하고 배꼽 잡고 웃는다고 해서 허리 부러질 염려는 없겠다 싶어 길을 나섰다. 지난여름 동의보감촌에서 <오작교 아리랑> 볼 때 남돌이 역을 너무도 찰지고 재미있게 하시던 정형상 형이 운전했다. 정형상 형은 이날 사진도 찍어 주었다. 예정대로 경호중학교 앞 주암식당에서 어탕국수 한 그릇 먹었다. 이 집 어탕국수에 매료됐다. 다음에도 동의보감촌 마당극 보러 갈 일 있으면 앞으로, 뒤로 시간을 맞춰 무조건 이 집에서 한 그릇 하기로 다짐 둔다. 놀랄 만한 사실은, 공연을 보는 동안 무대 뒤편에 장엄하게 펼쳐진 가을 지리산의 알록달록 단풍들은 한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연 끝난 뒤 비로소 ‘경치조차 아름다웠구나’ 하고 깨달았다. 뿌연 안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공연을 보면서 극단 큰들이 21세기 우리들에게 들려주고픈 전언(메시지)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사실은 첫회 공연 전체를 녹음하여 여남은 번 들었다. 외울 정도는 아니지만 주요 대사는 기억에 담을 만했고, 그래서 두 번째 공연은 더욱 귀에 잘 들어왔던 것) 그 전언은 주로 남명 조식의 입을 통하여 전달되었고 간혹 함께 등장하는 하인들, 제자들이 대신 전달하기도 했다.
조선 명종 당시 수렴청정을 통해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문정왕후를 비판하는 대사가 줄을 잇는다. 그런 대사들은 사실 오늘날 우리 나라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이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거나 당리당략에 빠져 있으면 백성들 삶이 곤궁해지는 건 정한 이치 아닌가. 조선시대에 화적 또는 활빈도 들이 더 많이 나타난 때는 구중궁궐이 암투에 휩싸여 있었거나 명종조처럼 수렴청정이 도를 넘었을 때이거나 사화와 당쟁으로 어지럽던 시기이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그가 살던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통령, 장차관, 국회의원 등 고위 공무원뿐만 아니라 행정일선에서 민원인을 상대하는 공직자들이 꼭 실천해야 할 지침서 아니던가.
당시 정치를 비판하는 건 유생이나 하인들 말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수석 하인 돌이는, 밥은 굶어도 물배는 가득 채우고 살지 않느냐는 아낙의 말에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밥을 먹고 배가 불러야지 물로 배를 채우는 게 말이 돼유? 우리 우물이 암만 좋아도 저 윗물이 썩어 있으니께 우리가 배를 곯는 거 아니겄슈?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면 백성들만 살기 힘든 법이에요.”라고 일갈한다. 하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말투는 쉽지만 그 내용은 촌철살인이다. 남명 조식 선생 댁 수석 하인답다.
그런 한편 남명 조식 선생이 이퇴계를 논박한 이야기도 잠시 언급한다. 선비라고 해서 물 뿌리는 일도, 비질하는 일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유생들은 “‘제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성리학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입만 놀리는구나!’라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네”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우리 스승님은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을 제일 싫어하셨네. 그것이 바로 스승님이 늘 강조하시는 경의사상이지. 안으로는 성찰, 밖으로는 실천, 이것이 바로 경의사상 아닌가?”라고 강조한다.
남명 조식 선생의 경의사상은 성성자(惺惺子)와 경의검(敬義劍)이라는 구체적인 사물로 드러난다. ‘성성자’ 방울은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정신을 깨우치는 데 사용하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니 잡념을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성(惺)은 도리를 깨닫는 것이니 자신을 경계하는 역할을 말한다. 또한 경의검 오른쪽에는 ‘내명자경’이라 새겼고 왼쪽엔 ‘외단자의’라는 글을 새겼다. 경의사상을 여덟 글자로 풀어쓴 것이다.
이를 두고 유생들은 “스승님은 늘 칼과 방울을 지니고 다니신다네. ‘성성자’가 울릴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경의검’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단칼에 끊어내신다네.”라고 강조한다. 성성자와 경의검은 나중에 남명이 숨을 거둘 때 제자들에게 물려준다. 경의사상을 잊지 말고 삶과 학문에서 꼭 실천하라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성성자와 경의검을 제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남명의 정신이 잊혀지거나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걸 상징하는 듯하다.
남명은 말한다. “배운 자들이 알고도 행하지 않으니 백성들의 삶이 갈수록 처참하다. 많이 배웠다는 자들이 벼슬에 올라 백성들을 착취하는 꼴이 마치 이리떼와 같지 않더냐? 많이 배울수록 백성들에게서 더 많이 빼앗는다면 도대체 학문은 왜 한단 말이냐? 배운 자들이 청렴하고 정의로워야 백성들이 평안할 것이다. 알겠느냐?” 조정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물러앉아 평생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며 실천을 강조한 남명다운 고민이자 탄식이다.
한편 이 고을에 새로운 사또가 부임한다. 새 사또는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 중 한 명이 낙점된다. 이런 건 정말 큰들답다. 대략 5분 동안 사또 노릇을 하고 있노라면 그새 또 새 사또가 헛기침을 하며 부임한다. 이방, 형방, 공방 등 아전들은 “사또 회전율이 빨라도 너무 빨라…. 이게 다 한양의 저 윗대가리들이 돈독이 오를 대로 올라 가지고 돈만 갖다주면 사또 자리를 막 내주어서 그런 거야! 아이구 답답해!”라고 비난한다. 현실은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그래도 우리 팔자가 상팔자야. 사또는 매번 바뀌지만 우리는 안 바뀌잖아. 우리가 철밥통이야. 사또는 우리 하기 나름이에요.”라고 자위한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바뀌고 그에 따라 장차관이 바뀌고 장성이 바뀌고 도지사, 시장, 군수가 다 바뀌어도 행정 일선에 있는 공무원들이 무사안일에 빠져 있으면 될 일이 없다는 것을 일깨우는 명대사이다. 예전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복지안동, 복지뇌동 행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풀이되면서 공직사회를 좀먹고 있다는 비판이다. 마당극 <남명>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책이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나름 잘 굴러가는 것은,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보다 공리민복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공무원이 더 많은 덕분일 것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5분 사또’는 <최참판댁 경사 났네>에 등장하는 ‘등등 동지’, <오작교 아리랑>에 등장하는 ‘남돌이’와 함께 앞으로 <남명>의 대표 화제가 될 공산이 크다. ‘5분 사또’는 사또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목에 힘을 주고 “우리 고을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취임사를 읽지만 그 다짐을 실천할 기회를 얻지는 못한다. 한 몸 다 바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 우리 세태를 풍자한 것이리라.
새로 부임한 ‘미스터 션사또’(인기 연속극 <미스터 션샤인>을 살짝 베끼는 재주라니!)는 문정왕후로부터 ‘네 하고 싶은 건 다 하라’는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처음 근엄하고 정직한 것처럼 무게를 잡던 ‘션사또’는 마음을 가다듬고 진짜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 보다 싶어 짐짓 몸가짐부터 바로 잡으려는 아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야, 이걸 그렇게 티나게 하면 어떻게 해? 세련되게 해야 될 것 아냐, 세련되게! 잘못 보면 이것 갑질이라고 난리가 나!” “내가 사또 자리 따려고 쓴 돈이 얼만 줄 알아? 강남에 있는 기와집을 세 채나 팔았다 이거야! 강을 팔든 땅을 팔든 아니면 나라라도 팔든 (백성들 고혈을) 짜낼 방법을 말해 보란 말이야, 창조적으로!” ‘위디스크’ 양 부자(회장) 이야기도 등장한다. 표나지 않게 갑질하자는 신관 사또의 호령이 쩌렁쩌렁한다.
‘창조적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라는 션사또 앞에서 이방, 호방, 형방 나부랭이들이 고민에 빠진다. 션사또가 귀띔을 해준다. “백성은 물, 그저 퍼도 퍼도 계속 나오는 우물이라는 거 몰라? 우물!” 귀가 번쩍 뜨인 이방이 기발한 착상을 해낸다. 우물 가에 모여 빨래하는 아낙과 조식 선생 댁 하인들 앞에 나타난 이방과 션사또는 과연 어떤 해괴망측한 짓을 저지를 것인가. “고마 하늘 하고 땅 하고 팍 붙어삣시모 좋겄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이 펼쳐진다.
백성은 물이라 했다. 임금은 배라고 했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엎을 수도 있다는 논리는 조선시대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다. 남명 조식 선생도 ‘민암부(民巖賦)’에서 이를 강조했다. 하지만 션사또 일당은 백성은 물이라는 말을, 퍼도 퍼도 계속 나오는 우물이라고 한다. 이 망할 놈들 같으니!
자칫 단조롭고 건조하기 쉬운 주제를 부드럽게 풀어놓기 위한 웃음 요소도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 마당극이라는 연희 형식이 갖는 특징을 모자람없이 보여준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다가 갑자기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입을 가리는 관객도 많았고 그냥 되는대로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관객도 제법 많았다.
수석 하인 돌이가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것이 우리네 미풍 양속 아녀요?”라고 말하니 “먹는 게 부족할 땐 슬쩍 빠져주는 것도 미풍양속이다.”라고 말하던 남명 조식 선생이다. 그런데 불과 몇 분 뒤에는 남명 선생이 반대로 말하자 대뜸 “아이구, 뭔놈의 미풍양속이 샌님 마음대로래요? 엿장수에요?”라고 받아친다. 이에 할말이 없어진 남명은 “이놈이? 아, 정해진 게 어디 있냐? 실사구시하는 거지.”라고 눙치며 넘어간다.
스승 남명 조식 선생의 성성자와 경의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유생들이 “우리도 하나씩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다른 유생이 “이미 배송 중일세. 다섯 개를 주문하니 배송료를 받지 않더군.”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무료배송? 하하하….”라며 웃는다. 갑자기 쳐들어온 왜적들에게 화친을 하겠다는 유생에게 “자네 왜구의 말을 할 줄 아는가?”라고 묻자 “조또!”라고 한다. 수석 하인 돌이와 남명과의 대화도 재미있다. 하인 돌이가 남명 면전에서 “스승님, 밥 다 됐어요. ‘조식(朝食)’ 드시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건 요즘 유행하는 아재개그의 전범이다. ‘몰래 싱카 놓았다’ 해서 ‘몰카’라고 하는 대사는 경상도 사투리를 제대로 살려낸 기막힌 조어법이다.
<남명> 이야기의 흥미가 최고조에 이른 것은 남명이 사직상소(을묘사직소, 단성소)를 올리는 장면이다. 남명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가 나아가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가 갈등과 번뇌에 휩싸인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백성을 위한 길인지 다만 생각하고, 생각하고….’ 갈등하던 남명은 ‘백성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며 구체적인 실천을 묻는 하늘의 울림, 천왕봉의 꾸짖음을 듣는다. 하늘의 울림과 천왕봉의 꾸짖음은 사실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죽임을 당한 선비들의 혼령이자 굶주려 죽은 백성들의 원혼이다. 남명은 ‘나는 무엇을 했느냐’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목숨을 버리더라도 할 말은 하고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을사사화는 조선 4대 사화 가운데 하나로서,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나, 대윤이 소윤으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을 가리킨다. 비명에 죽은 명사만도 을사사화 이래 5~6년간 100여 명에 달한다. 사화는 ‘사림의 화’의 준말로 사림파들이 화를 입은 사건들을 말한다.
이때 남명을 단성 현감에 제수했다는 교지가 내려온다.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남명이었지만 단성 현감을 받아들인다. 그러고서는 곧바로 목숨 걸고 사직소를 올린다. 현감을 받아들인 것은 사직상소를 올리기 위해서였다(실제 역사에서는 현감을 거부하면서 소를 올린다). “임금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자들이 도처에 있으니 임금께 내 뜻을 전할 방법은 사직소밖에 없다.”는 남명의 말에 하인 돌이는 “사직소는 잘못 썼다가 눈 밖에 나면 큰일나잖아요?”라며 말린다. “큰일이 나도 할 일은 해야 할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남명의 목소리가 강단졌으니 의지가 꺾이지 않을 것임을 느낄 수 있다. “돌이 너는 네가 할 일을 하거라.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테니!”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피해 가거나 외면하지 않겠다는 남명의 의지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새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 조아려 주상 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떠났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희희덕거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높은 자리에서 빈둥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 모으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신이 요사이 보건대 왜구가 침략해 백성들이 목숨을 뺏겨도 나서서 지켜주는 장수가 없사옵니다. 평소 조정에서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장수 가운데 자격을 갖춘 자가 없고 성을 지킬 군졸이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 집도 없이 떠도는 백성이 궁벽한 골짜기에 이르러 원망에 차서 울부짖는 자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쳤는데도 위로 통할 수가 없사오니 전하와 신하 사이를, 전하와 백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자들을 물리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대비께서는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학문을 통해 마음을 바로잡아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바탕으로 삼으시고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전하께서 신의 상소를 굽어 살펴 주실 것이라 믿고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남명이 사직소를 올렸다는 말은 곧장 선비 사회로 퍼져 나간다. 문정왕후의 폭정에 숨죽이고 있던 조선사회에 사이다 같은 발언을 남명이 쏟아낸 것이다. “호외요!”라고 외치며 신문 파는 소년이 등장하고, 어떤 선비는 공감댓글을 달겠다고 하고, 어떤 선비는 전체 문장을 줄줄 외운다고 말한다. “이 사람은 목숨이 두 개라도 된단 말인가?” “을사년 사화 이후로 목숨 걸고 바른말하는 선비가 얼마만인가?” “조선 역사에 이런 상소는 처음 보았네.” “탄산수 같은 상소였네!”라는 말이 선비들 사이에 회자된다. 10번씩 필사한 사람도 나온다. “좋아요!”도 등장한다. 을사사화 이후 숨죽이고 있던 조선 선비들은 남명의 사직상소에 감동받아 너도나도 제자가 되겠다며 산청 산천재(山天齋)로 찾아간다. 이들은 2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책을 던져두고 칼을 찬 의병장이 된다.
남명은 제자들에게 묻는다. 남명은 우리들에게 묻는다. 남명은 우리 사회 관료와 위정자들에게 묻는다. 남명은 우리 사회 교육자들에게 묻는다. 그리고 제자들이 답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진심으로 답해야 할 차례다. “너희들은 공부를 왜 하느냐?” “나를 알고 세상을 알기 위해 합니다.” “왜 알고자 하느냐?” “제대로 알아야 정의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느냐?” “그래야 백성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마당극 <남명>은 72살까지 살다 간 남명의 일대기를 요약하여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핵심 사상인 ‘경의사상’을 여러 차례 풀어서 설명해 준다. 설명은 지루하지 않고 어렵지 않다. 앞서 말했듯 하인의 입을 통해, 유생들의 행동을 통해 들려주고 보여준다. 그러나 남명 사상의 고갱이는 임진왜란 발발 후 스스로 일어난 의병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의령 곽재우, 합천 정인홍, 고령 김면, 함양 조종도, 초계 전치원, 산청 오장, 단성 이유성, 진주 이정, 거창 문위의 이름을 기억하자. 남명의 경의정신은 어떻게 역사속에서 되살아나는지 기억하자. 위대한 스승이 다시 세상을 깨우는 소리를 들어보자. 마당극 <남명>을 보자.
마당극 <남명>에는 새로 만든 노래가 몇 곡 나온다. 그 가운데 <배움의 길>(남명의 시 ‘민암부(民巖賦)’를 놓고 공동으로 가사를 짓고 전찬율이 곡을 붙였다)이라는 노래는 호탕하고 힘차서 멋지다. 첫회 공연 때 녹음한 것을 몇 번 듣다 보니 가락이 흥겨워서 좋고 가사가 뜻깊어 더 좋다. 아침에 깨어나면 저녁까지 몇 번이나 흥얼흥얼 따라 부른다. 가사는 이렇다.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배라.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엎을 수도 있다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엎을 수도 있다네. 안으로는 경 밖으로는 의. 청렴하고 정의로운 선비들이 되세. 백성 위한 배움 백성 위한 실천. 백성들의 웃음소리 얼씨구나(좋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대아고등학교 아인 박종한 교장선생은 제3회 남명제까지 두류문화연구소(즉 대아고)에서 주관하던 남명제 행사를 제4회 때부터는 남명 정신의 확산을 위해 경남사립중고등학교장회에서 맡아 진행하도록 했다. 왜일까. 왜 박종한 교장선생은 남명정신을 우리나라 사학의 연원으로 삼으려고 하셨을까. 남명이 제자들을 모아 경의정신을 가르치던 덕천서원은 사학이다.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 아니다. 따라서 그 남명정신을 오늘날 사립학교에서 이어받아 마땅하다고 본 것이다. 박종한 교장선생은 ‘남명정신은 경남 사학의 연원입니다’라는 글귀를 써서 액자에 넣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수 없다. 우리나라 모든 교육현장에서 경(敬)과 의(義)를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사립, 국립을 가를 수 없다. 마당극 <남명>을 오늘날 정치인과 정부관료들이 보아야 하고 중고등학교 교사와 학생, 대학 교수와 대학생들도 반드시 보고 느껴야 할 까닭이다. 참 뜻깊고 무척 재미있으며 아주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대작 마당극 한 편이 탄생했다.
(10월 20일 첫회 공연과 11월 11일 2회 공연 사이에는 아주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대사도 조금 달랐는데 위 내용에서는 첫회 공연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이 작품은 경남문화예술진흥원 '2018년 지역형 콘텐츠 개발 지원 사업'의 하나로 기획, 제작됐으며 제42회 남명선비문화축제 때 처음 공연되었다. 예술감독 전민규, 기획 진은주, 연출 김상문, 극작 임경희, 무대미술 박춘우, 의상 하은희, 음악 전찬율, 드라마트루거 김세환, 출연 김상문 송병갑 김혜란 류연람 안정호 최샛별 오진우 김안순 이인근 박정민 김세영 조익준 홍수완 김가람)
2018. 11. 11.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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