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말과 글을 보는 내 눈

차 한 잔 주문하기도 어렵구나

by 이우기, yiwoogi 2018. 2. 6.

부산 출장 가는 길에 진영휴게소에 들렀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요기도 하고, 점심 먹고 나면 졸릴지 모르니 커피도 한잔하고, 겸사겸사 볼일도 보기 위해서다. 이 휴게소 지나면 목적지까지 곧장 가야 한다. 진영부터 부산까지는 길 사정이 좋지 않다. 몇 해 전 길 넓히는 공사를 한 덕분에 그나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거의 빈틈없이 이어지는 짐차와 트레일러 탓에 조심스럽고 더디기만 한 길이다. 장유휴게소 쪽으로 가는 날엔 그 휴게소가 마지막 쉬는 곳이 된다.

 

라면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입 안이 까끌거린다. 약간 매콤하기도 하다. 달달하고 고소한 그 무엇이 당긴다. 무엇으로 입 안 청소를 할까 생각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세로로 세워놓은 커피점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보통 배너라고 한다. ‘배너는 막대 광고, 띠 광고, 현수막(광고)으로 순화하라고 한다. 누가? 국립국어원이.

 


아무튼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녹차라떼나 고구마라떼를 한잔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배너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노려보다가, 째려보다가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달콤한 차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입 안을 헹구어 매운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이 한겨울 찬바람에 얼어 버렸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이런 줄 모르는 바도 아닌데, 그날따라 왜 그리 기분이 언짢아졌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국제화 시대, 세계화 시대, 글로벌 시대, 21세기 지식 정보화 시대에 영어든 일본어든 중국어든 러시아어든 우즈베키스탄어든 에티오피아어든 말레이시아어든 뭐든 열심히 배워 외국으로 나가 관광도 하고 사업도 하고 공부도 하면 얼마나 놓나. 누구든 어느 나라든 거의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세상이니 얼마나 좋은가. 미국, 영국에 갈 때는 영어를 배우고 중국에 갈 때는 중국어를 배우고 일본에 갈 때는 일본어를 배우고 우즈베키스탄에 갈 때는 그 나라 말을 배운다. 이것저것 배우기 귀찮고 힘들면, 인정하기 싫더라도 영어를 세계 공용어로 받아들여, 영어라도 착실히 배우면 된다. 손짓 발짓 하여 의사소통만 할 수 있으면 무조건 떠나는 사람도 쌨다. 외국어를 그렇게 떠받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소 입증하는 분이 많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가. 미국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 카자흐스탄 사람, 베트남 사람,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 케냐 사람 등 전 세계 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나라이다. 그래서 길 이름도, 건물 이름도, 음식 이름도 세계 각 나라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적어주면 좋겠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세계 수백 개 나라 말을 다 적어 줄 수는 없다. 결국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정도 적어 준다. 요즘은 베트남어도 적어 주는 곳이 늘고 있다. 중국어나 일본어는 그 나라 사람들이 하도 많이 드나들기에 편의를 봐 주는 것이고 대개 영어로써 의사소통을 하라는 게 맞다고 본다.

 

커피 판매점 홍보 입간판을 보고 이 따위 긴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순간 생각난 것은, ‘나는 누구이고 지금 어느 나라에 와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먼저 ‘NON COFFEE’커피가 아니다라는 걸 알겠다. ‘SMOOTHIE’스무디라고 읽는 줄은 알겠는데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맛과 냄새는 어떤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ESPRESSO BEVERAGE’에서 에스프레소는 어쨌든 들어 본 말이어서 얼추 짐작하겠는데 ‘BEVERAGE’는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음료, 마실 것이라는 뜻이란 걸 나중에 사전 찾아보고 알았다. ‘TEA’도 알겠다. 다행이다. ‘ICE BEVERAGE’에서도 ‘ICE’만 알아보겠다. 낯선 영어 앞에서 한참 동안 어리둥절하다가 당황하다가 결국은 황당하여 헛웃음만 나왔다. 찬바람 부는 겨울날 뻥 뚫린 휴게소에서 헛웃음 몇 번 날리고 나니 입 안에 오히려 개운해져 차 한잔하려던 생각이 싹 가신 것이다.

 

커피가 아닌음료는 대개 알겠다. 초콜릿, 그린라떼, 유자차, 군고구마라떼, 화이트 초코, 홍삼라떼도 들어본 이름이다. 그런데 라떼는 많이 들어보고 먹어보긴 했지만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찾아본다. ‘라떼뜨거운 우유를 탄 에스프레소(espresso) 커피(‘라테라고 적는 게 맞을 듯한데). 그럼 에스프레소 커피는 무엇인가. ‘강한 압력으로 추출한 이탈리아식 커피라고 한다. 만드는 방법은 조금 다르지만, 그냥 커피라고 해도 되겠다. 색깔이나 맛이나 냄새가 조금 다르니 다르게 불러주고 싶다면 진한 커피라고 하든지 쓴 커피라고 하든지. 이탈리아식이라고 하니 이탈리아 커피라고 해도 좋겠건만. 하나는 해결했다.

 



다음 ‘SMOOTHIE’는 무엇일까. 나 어릴 적엔 이른 이름의 음료나 마실 것은 없었는데 언제부터 어떻게 하다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영어사전에서는 ‘SMOOTHIE’세련된 남자’, ‘입에 발린 소리를 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좀 웃긴다. 백과사전을 보니, ‘신선한 과일 등을 얼려서 갈아 만든 음료라고 한다. 과일 외에도 부순 얼음, 얼린 과일, 얼린 요구르트 등을 넣기도 한단다. 과일주스인데 얼려서 갈아 만든 게 다른 점이다. ,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구나.

 



카푸치노는 어떻게 만드는 것이고 어떤 맛을 내는지, 마키아또는 또 어디에서 온 물건인지, 모카는 어떨 때 먹으면 좋은지 따위 자잘한 것을 구별하기 어렵고 익히기는 더 어렵다. 흔히 라고 알고 있고 그래서 매우 익숙하다고 여기고 있는 ‘TEA’도 후레쉬 티, 밀크 티를 지나 허브티 캐모마일, 허브티 페퍼민트로 깊이 들어가니 낯설어진다. 캐모마일과 페퍼민트는 무엇일까. 식물() 종류일까, 끓이는 방법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고개를 갸웃거린다. 알 수 없다. 페퍼민트는 롯데껌 이름에서 본 듯도 하고...

 



얼음 음료를 가리키는 ‘ICE BEVERAGE’에 눈길을 주고서도 나는 발길을 옮길 수 없었다. 레몬, 오렌지, 자몽, 복숭아 따위는 물론 알겠다. 내 눈길은 에이드에 머물러 있다. ‘Ade’는 또 무엇일까 싶은 것이다. 여러 번 들어 본 것이어서 이름 자체가 낯설지는 않지만 그 뜻이랄까 그 만드는 방법이랄까 그 맛이랄까, 아무튼 잘 모르는 것이다. 사전에서는 과실의 살과 즙을 섞어 받은 것이라고도 하고 과즙에 설탕, 꿀 따위를 넣어 맛을 낸 음료라고도 하는데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오다 가다 한두 번은 마셔 보았을 텐데.

 

이 정도 이야기하고 나면, 나는 영락없는 촌놈이다. 무식한 상촌놈이다. 어쩌다 커피점에 가면 아메리카노나 라떼만 먹는다. 그나마 많이 발전한 것이다. 복잡한 이름의 커피는 주문하기가 어려워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지금 말하고 있듯이, 나는 다양한 커피의 종류와 맛을 통 구분할 줄 모르거니와 그 맛이나 향도 구별하지 못한다. 여름에 마시는 것도 거기서 거기다. 스무디나 에이드 같은 건 외면한다. 먹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 거추장스러워서이다.

 

어쩌다 커피점에 가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는 것을 두고 그나마 많이 발전한 것이라고 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철들어 커피라는 해괴한 마약을 먹어본 뒤 줄곧 섞은 커피(믹스커피)를 마셨다. 자동판매기에서 나오는 것도 마셨고 커피 둘, 설탕 둘, 믹스 하나 이렇게 섞어 먹는 일명 다방커피도 마셨다. 한때 인생은 쓴맛이지라면서 블랙커피를 마신 적도 있고, 귀엽고 앙증맞은 잔에 간에 기별 갈 만큼 따라주는 에스프레소를 마셔본 적도 있다. 하지만 역시 만만한 건 아메리카노였다. ‘아메리카노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 아메리카노는 무슨 뜻일까. 아메리카노란, 술 이름이기도 하고 커피 이름이기도 하단다. 이리저리 뒤져보니, 첫 번째 ‘1900년대 초 이탈리아의 술임에도 칵테일을 즐기는 미국인을 칭찬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명이 나오고(), 두 번째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더한 커피. 농도는 일반적인 드립 커피와 비슷하지만 풍미가 다르다. 미국에서 주로 마시는 커피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명도 나온다(커피). 내가 보기엔 믹스커피 일명 다방커피보다 묽고 연하고 말갛게 보이므로, 묽은 커피, 투명 커피, 맑은 커피, 물 탄 커피라고 하면 딱 좋겠는데...

 

진영휴게소 커피점 안내 입간판 앞에 서서 이런 생각 저런 고민을 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에라, 모르겠다. 따따부따 간섭한댔자 새겨 들을 사람도 없을 것이고, 이미 이만큼 와 버린 것을 되돌릴 수도 없을 것이며, 하나하나 새 이름을 붙여주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되는대로 먹고 주는 대로 마시고 내키는 대로 즐기며 살자.’ 하지만 뒷덜미에 부는 입춘바람은 차갑기만 했다. 마치 몇 올 남지 않은 머리끄덩이를 잡아채기라도 하는 듯이.

 

2018.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