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이다. 큰 대(大), 추울 한(寒)이다. 일년 가운데 가장 추운 날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대한이 소한(小寒)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이 있다. 실제 소한은 1월 5일이었는데 매우 추웠다. 대한인 1월 20일은 포근했다. 겨울 날씨가 퍽 따뜻한 걸 ‘푹하다’고 한다. 대한인 1월 20일은 좀 푹했다.
백만년 만에 석갑산 갈 마음을 먹는다. 백만년이라. 무심코 불쑥 ‘좀 긴 기간’을 말할 때 ‘백만년’이라는 말을 곧잘 쓴다. 왜 우리는 백만을 좋아하는 걸까. 백만 송이 장미, 백만장자, 육백만 불의 사나이 때문일까. 십만 송이 장미, 억만장자라는 말이 없지도 않는데 말이다. 아무튼 백만년 만에 석갑산 나들이를 해 본다.
국민주택 140호 마트에서 물을 한 병 산다. “만 원 짜리밖에 없는데요.”라고 하니 “십만 원 짜리도 괜찮소.”라며 웃는다. 등산이라고 하기엔 민망하고 산책이라고 하기엔 아주 조금 숨이 가쁜 석갑산은 겨울을 어떻게 났을까. 궁금증이 조급증으로 바뀌어 안달이 났던 것일까. 발걸음이 바빠졌다.
사람들은 여유롭다.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낸 승자의 미소가 보인다. 어머니와 아들, 중년 부부, 활달해 보이는 친구들 서넛, 할머니와 그를 둘러싼 가족들이 오르고 내리고 있다. 검정 옷, 알록달록 옷, 창 달린 모자, 빵모자, 검은 장갑, 털장갑, 등산화, 운동화, 배낭…. 눈에 들어오는 건 지난해나 올해나 달라진 게 거의 없다. 그래도 다르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은 벌써 밭갈이를 해 놓았다. 고랑과 이랑을 갈무리해 놓았는데 거기엔 무엇을 심을까. 지난해엔 고구마를 본 듯도 하고 배추를 본 듯도 하고 무를 본 듯도 하고 옥수수를 본 듯도 하다. 모두 다 본 듯도 하다. 부지런한 농부가 경운기도 없이 일소도 없이 삽과 괭이로 땅을 일구어 놓은 것을 본다. 그 옆 밭엔 마늘과 시금치가 땅기운을 듬뿍 들이마시며 여물어가고 푸르러가고 있다.
밭 너머, 찬바람 부는 겨울을 이겨내는 나뭇가지를 본다. 잎사귀를 죄 떨구어낸 나무들은 지난여름 싱싱했던 푸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땅 속에서 꼼지락꼼지락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봄기운이 발바닥을 간질이고 있을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날아다니며 짹짹거린다. 섣부른 봄마중이라도 하는 것인지.
눈길을 더 멀리 던져 본다. 진주시 평거동 아파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떤 게 ‘한보’고 어떤 게 ‘대경’이고 어떤 게 ‘흥한’인지 정확하게 나누어지지는 않지만, 대충 거기서 거기인 줄 알겠다. 한보, 대경, 흥한, 한주라는 이름을 가진 건설회사가 있었다. 1980~2000년을 풍미하던 진주지역 대표적 건설회사들이다. 그때 지은 아파트들은 진주지역 아파트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들말지역에 지은 한보, 흥한, 대경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최고급 사양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값 같은 건 원래 관심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이 지역 아파트들은 한때 진주의 부의 상징이었고 아파트의 상징이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네 개 건설회사 가운데 세 개가 부도났다. 그 뒤로 아예 사라진 회사도 있고 기사회생한 회사도 있다. 지금이야 서울, 부산, 대구, 광주 가릴 것 없이 다른 지역의 건설회사들이 쳐들어와 아파트들을 지어대지만, 그때만 해도 ‘진주 건설 4사’가 주름잡던 시절이다. 웬만한 행사에는 이 건설회사 사장들이 귀빈으로 참석하였다. 덩달아 협찬도 많이 하였다. 이 회사들과 하청회사를 포함해 그 아래에서 밥먹는 진주 인구가 제법이었다. 그래서 이 회사들의 부도로 지역경제는 크게 휘청거렸다. 어느 회사인지는 모르지만 ‘흑자부도다’라는 말도 돌았다.
들말한보 아파트에 집알이를 간 적 있다. 1990년대 중반이다. 좋은 재료에 잘 지은 새 아파트를 보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 방 저 방을 둘러보면서 부러움이 생겨났다. 화장실, 주방을 살펴보며 시샘도 솟았다. ‘나는 언제 이런 아파트를 살 수 있을까’ 막연하게 기대해 보기도 했고 ‘내 월급으로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이런 아파트는 살 수 없을 거야’ 막연하게 절망도 해 보던 때이다. 높고 넓은 아파트를 보면서, 그 안에 펼쳐진 궁궐 같은 장식들을 보면서 ‘꿈’과 ‘깸’을 동시에 맛보던 시기이다.
아파트 너머 망진산이 보인다. 갈색 망진산은 말없이 흐르는 남강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오밀조밀 모여 사는 신안ㆍ평거동 아파트 단지를 응시하고 있다. 망진산을 망경산이라고도 한다. 망진산이라고 하면 진주(晋州)를 바라본다(望)는 뜻이고, 망경산이라고 하면 서울(京)을 바라본다는 뜻인데 어느 게 맞을까. 망진산은 望鎭山으로도 쓴단다. 어릴 적엔 망경산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망진산이라고 했다.
망경산이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어째서인가. 망경동, 망경초등학교라는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망경동, 망경초등학교와 같은 이름이 생겨날 때 이 산은 망경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망경산을 망진산이라고 바꿔 놓고 보니 망경동도 망경초등학교도 생뚱맞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망진산이 맞다고들 한다.
디지털 진주문화대전에는 망진산에 대하여 “망경산(望京山)이라고도 한다. 『진양지』에는 “망진산은 주(州)의 남쪽 강변을 넘어 6리에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망진(望晉)은 곧 망진(網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망경’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 어느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와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늘 이산에 올라와 북쪽(서울)을 바라보았다는 전설이 있어 붙여졌다. 국상(國喪) 때에는 서울을 향하여 곡(哭)을 하였다고 한다.”고 적어 놓았다. 망진산이 원래 이름이고 망경으로 잘못 부르다가 다시 제 이름을 찾은 격이다.
디지털 진주문화대전은 설명한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2천여 명의 시민 모금으로 복원된 망진산 봉수가 있고, 정상에는 방송국 송신탑이 있다. 정상 주변에는 무궁화 꽃동산을 가꾸어 놓았으며,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주민들의 운동 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보물 제371호로 지정된 단성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금선암과 정법사, 월경사, 총림사, 약정사, 보덕암 등 유명 사찰이 많다.”
발길을 옮긴다. 백만년 만에 가 보는 석갑산이지만 달라진 건 거의 없다. ‘산불조심’ 구호를 색다르게 만들어 놓은 것 말고는 그대로다. 하긴 말로는 백만년이라고 했지만 지난가을에서 1월까지 두세 달밖에 지나지 않은 것 아닌가. 그 사이 상전벽해처럼 바뀌기라도 바랐다면 그게 더 웃기는 일이다. 그 시간 속을 살아내는 인간의 삶이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지만 자연은 의구하다. 인간이야 몇 달 사이에라도 말짱하다가 아프고 아프다가 죽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고고지성이 들려오곤 하지만.
등산길을 오르다가 우뚝 멈추었다. 길 가운데 제법 큰 나무를 베어낸 흔적이 눈에 확 달려들어온 때문이다. 나이테로 짐작하건대 30~40살은 되었을 법하다. 흔적을 자세히 보니 벤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톱밥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 왜일까. 나무가 위에서부터 말라죽어가고 있었을까. 소나무 에이즈에라도 걸린 것일까. 그냥 가고오고 오고가는 데 걸리적거려서일까. 모르겠다. 사람들의 숱한 죽음을 목도하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정을 느껴본다. ‘추운 겨울 지나고 따뜻한 봄날이 오면 나무 베어낸 그루터기에 사랑스러운 새싹이 자랑처럼 돋아나지 않을까. 그 새싹은 가고오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무사히 피할 수 있을까.’ 쓸데없는 연민을 느껴본다.
조금 더 오르는데 소나무 한 그루는 뿌리째 뽑혀 드러누웠다. 모진 태풍이 불지도 않았는데 어쩐 일일까. 꼭대기를 지나 내리막으로 들어서는데 이번에도 소나무 한 그루가 가로 누웠다. 크기로 짐작하자면 30년은 된 듯한데. 주변 다른 나무들은 말짱한데 혼자 아랫도리가 부러져 꼬꾸라질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소행일까. 자연의 섭리일까. 석갑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화기 전원이 꺼지는 바람에 하나하나 찍지 못한 게 외려 다행스럽다.
베어지고 부러지고 뿌리째 뽑힌 나무들은 겨울 지나 봄이 오면 무엇으로 되살아날까. 따뜻한 봄날 되살아나는 건 나중 일이고, 나무로 군불을 때는 어느 절집이나 어느 가난한 집안에 끌려가 활활 타오르는 잉걸불이나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어느 시절 진주라는 도시의 석갑산이라는 산에서 한창 푸른 기운을 자랑하던 때도 있었노라고 자랑이라도 하든지.
한보, 한주, 흥한, 대경 아파트 건설회사들도 엄혹했던 외환위기를 지나고 다시 찬란한 봄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밝은 빛과 함께 생겨났다가 말없이 명멸해 가는, 그저 수많은 기업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진주를 이만큼 일구는 데 이바지했노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날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백만년만 기다려 주면 그런 날이 올까.
고미숙은 ≪몸과 인문학≫에서 “질병과 죽음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표징이자 생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아프지도 죽지도 않는 삶을 원하는가?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뱀파이어가 되면 된다.(…) 뱀파이어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는가? 죽는 것이다. 왜? 죽어야 사니까. 죽어야 삶을 느끼고 체험하고 겪을 수 있으니까.”(27~28쪽)
2018.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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