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일 마치자마자 집으로 곧장 왔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난봉꾼처럼 싸돌아다니지는 않지만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을 수 없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저녁 약속이 있었고 그런 날은 만취하기 일쑤였으니 제대로 된 가장이라 하기 민망했다. 마음으로는 반성했지만 해거름만 되면 걸려오는 전화를 뿌리치기 어려웠고 솟아오르는 알코올 생각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이제 본격적인 치과 치료에 들어갔으니 저녁 약속은 어지간해서는 잡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밤이슬 맞으며 돌아다니는 꼴을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다짐하는 것을 여기에 적어 놓는 까닭은 다른 사람들이 그리 알아서 헤아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길게 잡으면 두 해를 넘길 수도 있다. 도 닦는 심정으로, 건강 다지는 다짐으로, 가족을 위하는 각오로 긴 여정을 출발해 본다.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므로.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게 될 아들은 학교에서 6시에 마치고 온다. 아내는 퇴근 시간이 대중없다. 아들은 학교를 마치고 샛길로 샐 수도 있다. 친구집으로 가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때우고 오락실 갔다가 학원을 가기도 한다. 밥솥은 비었고 찌개는 식었고 반찬은 종잡을 수 없다. 냉장고를 열어본 뒤 일단 심호흡부터 해둔다. 누구든 집으로 오면 그때부터 밥을 하고 반찬을 꺼내 밥상을 차릴 것이라고 카톡으로 알려 놓는다.
어쩐 일인지 아들이 6시 조금 넘어 문을 연다. 맨정신에 아들 본 게 얼마만이랴 싶어 반갑기 그지없다. 지난 주말에 가족끼리 외식한 걸 벌써 까먹은 것이다. 엊저녁 늦게 볶음우동을 국물우동으로 잘못 끓여준 것도 금세 잊어버렸다. 고등학생이라 그만큼 애처롭고 애잔한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오는 길에 친구와 편의점에서 닭다리 하나씩 뜯고 오는 길이란다. 아닌게 아니라, 닭튀김 냄새가 낮게 퍼진다. 8시에 학원 간다는 놈은 제 방에서 잠시 머리를 식힌다.
쌀부터 찾아 씻었다. 희뿌연 뜨물을 서너 번 씻어내고 압력밥솥에 안쳤다. 처음엔 높은 불로 10분 정도, 다시 낮은 불로 5분 정도 지나면 밥이 된다. 1~2분 더 있으면 약간 눋는다. 1~2분 일찍 불을 끄면 진밥이 된다. 아들은 진밥을 싫어하므로 최대한 시간을 느루 잡는다. 압력밭솥 꼭대기에서 솥 안 압력을 못 이긴 김이 치치 소리를 내고 꼭대기 종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밥 냄새가 구수하다. 하루 동안 열심히 일한 자가 느끼는 밥내음이다.
달걀 세 개를 꺼낸다. 국그릇에 한꺼번에 깨어 넣는다. 달걀부침을 할 요량이다. 스팸을 꺼내 3분의 1정도를 잘게 깍둑 썬다. 엊저녁 먹다 남은 참치 깡통도 찾아내어 고깃덩이를 잘게 부숴 넣는다. 대파도 역시 잘게 썰어 넣는다. 달걀과 스팸과 참치와 대파가 고루 섞이도록 잘 저어준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른 후 충분히 예열한다. 그러고선 손바닥 크기만하게 달걀을 부쳐낸다. 이 먹음직한 재료들이 피워내는 향기는 아찔하다. 녹말 익는 냄새와 단백질 타는 냄새는 퍽 조화롭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듯하다.
다시 냉장고를 열어 떡갈비를 꺼낸다. 일요일 중앙시장에서 산 것이다. 아내와 난 “떡갈비 3장에 5000원”이라는 고깃집 주인의 말을 듣자마자 동시에 아들을 떠올렸다. 2장은 냉동실에, 1장은 냉장실에 있던 것인데 드디어 오늘 맛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소스도 있다. 떡갈비는 고깃집 주인이 일러준 대로 전자레인지에 1분만 돌렸다. 이미 한번 익혀 둔 것이므로 가볍게 데워 주면 고기 본래의 맛을 즐길 수 있다고 들었다.
이제 만두를 구울 차례다. 아들은 물만두보다 군만두를 더 좋아한다. 애비를 닮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여겨준다. 만두 네 개를 펼쳐놓은 뒤 프라이팬 남는 구석에, 토요일 외식 때 남겨 온 수제 소시지 똬리를 얹는다. 얼었던 만두가 녹자니 기름이 튀어 오른다. 모른 척 뚜껑을 살짝 덮어 둔다. 그즈음 밥솥 불을 끈다. 밥 짓는 시간이면 두세 가지 반찬은 뚝딱 해낼 수 있다. 만두와 소시지를 두어 번 뒤집으니 노릇노릇 잘 익었다.
마지막으로 먹다 남은 찌개를 데울 차례다. 밥솥을 한쪽으로 옮긴 뒤 찌개 냄비를 올려 센불로 끓인다. 팔팔 끓여야 한다. 찌개는 처음 지었을 때보다 다음날 먹으면 더 맛있는데 제대로 데우지 않으면 맛이 떨어진다. 깍두기도 꺼내고 김과 간장도 진설했다. 만두 찍어 먹을 간장도 작은 접시에 몇 방울 떨궜다.
그렇게 하여 저녁밥상을 차렸다. 아내는 7시에 마친다 했으니 기다리기 애매했다. 아들과 둘이 겸상을 한다. 맛있게 한 그릇 뚝딱 비워주는 게 여간 기쁘지 않다. ‘제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것보다 흐뭇한 광경은 없다’고 했던가. 한다고 했지만 또 생각해 보면 먹을 것도 별로 없는데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게 어른스럽게도 보인다. ‘제 눈에 안경’인가 보다. 좀 늦게 도착한 아내도, 비록 좀 식었을망정, 한 그릇 잘 드셨다.
집에서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장만하여 밥상을 차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냉장고를 잘 뒤져보면 먹음직한 반찬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아무것이나 대충 꺼내어 굽고 삶고 끓이고 데우면 된다. 재료마다 제 짝꿍이 있겠지만 얼추 맞출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먹던 음식, 바깥 식당에서 먹던 음식을 떠올려 보면 된다. 그림을 떠올리고 맛을 상상하는 게 중요하다. 기억 속 맛과 똑같을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는 다가갈 수 있다. 겁낼 필요 없다.
주말엔 라면이나 짜장면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차려낸다. 아내도 아들도 싫다는 말은 잘 하지 않는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가 주종목인데 보통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먹으려고 많이 끓이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월요일까지 먹는 일도 있고 어떤 때엔 다 먹지 못해 조금 버리기도 하는데 그래도 싫지 않고 밉지 않다. 아깝지도 않다.
퇴근하여 집에 오면 책 읽고, 글 쓰고, 페이스북에 댓글 달면서 시간을 보내기 쉽다. 취미생활이나 여가생활이 제 아무리 재미있고 유쾌하다 하여도, 아내가 늦는 날은 아들과 먹을 밥상을 내가 차린다. 아주 가끔 락영루 짜장면을 시켜 먹기도 하고 나가서 돼지국밥을 사 먹기도 한다. 아들이 먼저 문자를 보내오기도 한다. 피자빙고 고구마피자가 먹고 싶다, 맥도날드 상하이스파이스치킨세트가 먹고 싶다, 펭귄유통 꿀호떡이 먹고 싶다고 기별이 오면 어지간하면 사다 준다.
먹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고, 이런 일로 기분 상하게 하거나 언짢게 하거나 토라지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먹는 것은 추억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언제든 먹고 싶은 걸 모두 먹게 할 수는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지만, 함께할 수 있는 음식을 나란히 앉아 먹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만큼은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기나긴 인생에서 본다면 가족끼리 둘러앉아 한 끼 밥을 맛있게 먹는 것은, 되풀이되면 행복감을 아주 높여주지만 그러하지 못하더라도 그다지 서운하지는 않는 일이다. 마치 추어탕에 재피가루 한두 번 툭툭 뿌려주는 것처럼.
2018.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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