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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문화예술의 거리’에 서서 길을 잃다

by 이우기, yiwoogi 2017. 11. 25.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차가웠다. 차가웠지만 견딜 만했다. 빵모자를 쓰고 가죽장갑을 낀 데다 두꺼운 겉옷을 입은 덕분이다. 진주시 상대동 진주시청 앞 제이스퀘어 호텔에서 신안동 법원 뒤 우리집까지 걷는 게 목표였다. 딱히 걸어야 할 까닭은 없었다. 10월 중순부터 한동안 정신없이 바빠서 바람이 찬지 하늘이 높은지 나뭇잎이 떨어지는지 새겨볼 겨를이 없었다는 게 까닭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 될까. 까마득한 후배 혼인예배하는 데서 얼굴 잠시 보여주고 길을 나섰다. 걸어야 할 거리는 정해졌지만, 하지만 한번에 그 길을 다 걸을 생각은 아니었다. 경남도문화예술회관 근처 식당에서 오후 1시에 점심 약속이 잡혀 있었다. 진양교에서 남강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물오리들이 자맥질하는 것도 신기했고 저희들끼리 서너 마리씩 모여 노는 게 정답게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을 잘못 잰 탓에 30분이나 남아돌았다.

 


경남도문화예술회관 앞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진주대첩 광장 사업부지 내 조형물 이설공사. ‘본 과업은 진주대첩 광장조성 사업부지 내에 설치되어 있는 조형물(형평탑, 동기시비)이 광장조성 사업으로 이전이 불가피함에 따라 이전대상지를 선정하여 이설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공사안내표지판에 써놨다. 높다란 기중기가 서 있고 진주성 동쪽 문 앞 장어거리 옆에 있던 형평운동기념탑이 분해되어 옮겨져 있었다. 1016일에 시작하여 1214일에 끝낼 것이라 하니 반 이상은 한 듯했다. 서너 사람이 강바람을 맞으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는 19961210일 진주성 앞에다 형평운동기념탑을 세웠다. 그때 새겨놓은 표지석을 보면, ‘() 70여 년 전 어둡고 힘겹던 시절에 거룩한 인간 사랑의 횃불로 타올랐던 형평운동의 정신을 드높여 기리고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뜻있는 분들의 열의와 정성을 모아 유서 깊은 진주성 앞에 이 탑을 세운다고 밝혀 놓았다. 이제 경남도문화예술회관 앞으로 탑을 옮겼으니 이 글귀도 수정해야 하게 생겼다. ‘진주성 앞에 세운 것을 진주대첩 광장 조성한다고 쫓아보내어 다시 여기에 옮겨 세운다. 기왕 고쳐 새길 것이라면 이 곳이곳으로, ‘드높혀드높여로 고쳐주면 좋겠다. 마침표나 쉼표 같은 것도 꼼꼼히 챙겼으면 좋겠다. 형평운동기념탑을 옮기는 것은 임시 이전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어찌 되어갈지 지켜봐야겠다.


 

아무튼 이제 이곳에 형평운동기념탑이 서게 되었으니 이곳을 형평공원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바로 그 옆에는 1998117일 진주시와 창원지방검찰청진주지청이 청소년 푸른쉼터로 이름짓고 그것을 기념하여 빗돌을 세워 놓았다. 둔치와 그곳에 만들어 놓은 무대에서 청소년들이 이런저런 공연을 하고 놀이들을 하므로 청소년 푸른쉼터라고 한 듯하다. 빗돌 뒷면에는 여기 푸른 쉼터에서 맑은 기운을 북돋우며 찬란한 조국의 대들보가 되리니 어깨 걸고 마음 나누며 더 우뚝한 내일을 심자.’라고 새겨놓았다. 지은이는 최용호이고 글쓴이는 윤판석이다. 이 두 분은 꽤 유명하다. ‘더 우뚝한 내일을 심자이 말이 무슨 뜻일까 한참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그냥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여기는 청소년 푸른쉼터인가?

 


그러고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경상대 이갑렬 교수가 만들었다는 탑이 하나 눈에 띈다. 평소 오고가면서 자세히 보지 않아 있는 줄도 몰랐는데 오늘에서야 내 눈에 들어온다. 이 조형물은 신세계를 찾아서-십장생이다. 1996103일 세웠다. 십장생을 어디어디에 새겨놓았는지 찾다가 말았다. 강 건너 뒤벼리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선 미술품을 잠시 감상했다. 형평탑과 청소년 푸른쉼터와 십장생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했으나 아둔한 머리로는 해석해낼 수 없었다. 연결고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옆으로는 작가 이름도, 작품 이름도 모르겠는 철조망 같은 작품이 하나 있다. 분명히 어디엔가 설명글이 있을 텐데 못 찾았다.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경고글만 보였다.

 


그것 참 재미있다 싶어 그 옆으로 옮겼다. 시커먼 대리석인지 쇠인지 모를 조형물이 버티고 있다. 일단 높다. 가까이 가서 보니 因緣’(인연)이라고 써 놨다. 인연을 상징하는 미술품이라고 해야겠지. 뒷면부터 살폈다. 글자는 정명수가 쓰고 조상(彫像)은 정문현이 했다고 한다. 이 두 분도 유명하다. 조상은 뭘까. 사전에서 찾아보니 , 나무, 금속 따위에 조각하여 만든 형상이라고 한다. 진주시에서 1993421일 세운 이 인연탑은 어떤 사연이 있을까. ‘因緣으로 이름붙인 이 彫像은 이 고장의 千年文化集約하고 있는 남가람文化거리에 市民精誠을 모아 建立造形物이다. 높이 6.6M의 화강석 좌대 위에 높이 7M靑銅男女彫像으로 만든 因緣은 넉넉하고 따스한 人性雜草 같은 生命力으로 悠久歷史와 찬란한 文化傳統을 갈고 다듬어온 晉州人의 자랑스러운 예지와 드높은 氣像敍事的具象技法으로 表現作品이다. 晉州市民의 하나된 뜻을 모아 鄭文鉉彫刻하고 鄭命壽題字를 쓴 因緣永遠토록 남가람文化거리와 더불어 이 고장을 지키면서 뜨거운 晉州人靑史에 길이 하여 빛낼 것이다라고 설명해 놓았다. 당시 진주시장은 서정훈이다.

 

왜 이런 설명글에 한자를 섞어 썼을까. 어떤 낱말은 한글로, 어떤 낱말은 한자로 썼는데 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랬을까. 요즘 청소년들은 이 글귀를 읽기나 할까. 잡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무튼 여기는 인연광장이로구나 싶었다. 나쁘지 않았다. 이 설명글처럼 거창하게 주워섬기지 않더라도 진주시민이 모여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장소이니 그것을 일러 인연이라고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럼 이 일대는 형평공원도 되고, 청소년 푸른쉼터도 되고, 십장생 공원도 되고, 인연공원도 되는 것인가. 그건 그렇고, ‘청동남녀조상이라는 말에 눈길이 딱 붙들렸다. ‘남녀는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올려다보고 돌아보고 찾아봐도 모르겠다. 시커멓고 높은 이 쇠탑이 왜 인연을 상징하는지도 나는 모르겠다. 예술의 깊고 깊은 경지를 나같은 무지랭이가 알 리 없다.

 


이제 끝났는가. 아니다. 그 옆에 소 한 마리가 서 있다. 언제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 언젠가 신문에서 본 듯한데 잊어버렸다. 아무튼 이 소는 좀 밑도 끝도 없이 여기에 서 있다. 설명글도 없다. 진주가 소싸움을 처음 시작한 고장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어느 뜻있는 시민이 만들어 놓은 듯한데 현재로서는 아주 어색하기만 하다. 그럼 여기는 소 공원인가. 진주민속투우대회기념공원인가. 그건 아닌 듯하다. 이 소를 치우든지, 그냥 둘 것이면 뭐라고 설명이라도 좀 해놔야 하는 것 아닐까.

 


이제 끝났는가. 아니다. 그 옆에 세로로 선 빗돌이 눈에 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송죽매동산이라고 새겨 놓고 그 옆에 松竹梅라고 친절하게 한자로도 새겨놓았다. 그러니까 이 부근에는 소나무와 대나무와 매화나무를 많이 심어놓았고, 그리하여 이곳을 송죽매공원이라고 부르자는 뜻이다. 이름을 잘 지은 듯하긴 한데, 좀 낯설다. 동산이라고 부르기도 좀 그러하려니와 택시를 타서 이 이름을 들먹이며 찾아가자고 하면 기사분이 고개를 갸우뚱할 것만 같다. 아무튼 여기는 송죽매동산이다.


 

이제 끝났는가. 아니다. 맨 처음 형평운동기념탑 이전 공사를 하던 곳 옆에 학 날개를 편 듯한 조형물이 또 눈에 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한자로 飛翔이라고 써 놓고 그 아래에 자잘한 글씨로 뭐라고 설명해 놓았다. 로타리클럽에서 세운 이 탑의 상징에 대하여 전체의 구도를 의 두 날개로 형상화하여 晉州市市鳥인 백로를 상징하면서 우아하고 고결한 晉州市民의 기품과 창공으로 飛翔하려는 무한한 발전의 氣象을 나타냈으며 中心部에 배치된 대칭적 과 커다란 가슴은 對話和合 結束協同의 강열한 意志表現하며 양쪽날개에 배치된 몇 개의 은 아래로부터 위로 작은 것에서부터 큰것에로 指向해가는 市民의 드높은 理想希望을 상징하였음이라고 써 놓았다. 역시 좋은 말은 다 갖다 놓았다. ‘氣象이라는 한자를 눈여겨보아 둔다. ‘큰것에로라는 표현도 째려본다.

 

흔히 쓰는 비상은 한자로 飛上이라고도 쓰고 飛翔이라고도 쓴다. 앞의 비상(飛上)공중으로 날아서 올라감, 어떠한 한도나 한계를 뛰어넘어 벗어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뒤의 비상(飛翔)공중을 날아다님이다(다음 국어사전). 그렇다면 이 조형물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이 제대로 표현된 것인가.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꼭 한자로 써야 했다면 飛上이 더 잘 들어맞는 글자 같다. 그냥 한글로 비상이라고 해 놓았으면 모두들 아무런 혼돈 없이 잘 알아듣지 않았을까.

 

로타리클럽은 이 탑을 진주시민에게 바친다면서 이렇게 써 놓았다. 그때는 1983624일이다. ‘忠節氣像和合叡智濤濤히 이어온 晉州億劫을 하루같이 흘러온 남가람 위 불꽃으로 떠 永遠하다. 이에 眞實公平 友情公益追求하는 로타리精神을 그 얼에 보태어 크나큰 飛翔의 뜻을 탑으로 높여 晉州市民 모두에게 바치는 바이다.’

 

재미있는 일 두 가지를 발견했다. 로타리클럽에서 세운 비상탑에서 氣象氣像이 나왔다. 어느 것이 맞을까? 氣象바람, 구름, 비 등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다. 氣像사람의 타고난 기질이나 마음씨이다. 여기서는 氣像이 맞다, 당연히! 괜히 한자를 섞어 쓰다가 부끄럽게 됐다. ‘濤濤널리 퍼져 매우 왕성하다, 그득하게 퍼져 흘러가는 모양이 막힘이 없고 기운차다, 거침이 없고 힘차다라는 뜻이다. 보통 한자로는 滔滔이렇게 쓴다. 그런데 여기서는 濤濤라고 썼다. 어려운 한자 찾아 쓰느라 고생했다. 1983년이면, 나로서는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고, 많은 문서에서 한자를 섞어 쓰던 시절이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지금 이 글귀들을 본다면 누가 읽기나 할까 싶다.

 

, 이제 정리해 본다. 남가람문화거리는 진주시 망경동과 칠암동 일대에 걸쳐 있는 2.9km의 문화 예술 거리를 가리킨다. ‘진주문화대전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단계[문화예술의 거리, 진양교-진주교,(2.0, 41,390), 1992~1998]2단계[역사의 거리, 진주교-천수교,(0.9, 33,156), 1998~2002]로 구분되어 조성된 남가람문화거리는 진양교~문화예술회관~진주교~천수교에 이르는 칠암·망경 지구의 남강변 일대(74,546, 2.9)에 죽림을 복원하고, 야외 공연장, 기념비, 조형물, 휴식 공간, 진주성, 남강전망대, 천년광장, 중앙광장 등 문화 공간을 조성해 문화 예술 도시로서의 진주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경남도문화예술회관 앞 광장은 잡탕공원이 된 듯하다. 하나로 꿰맬 수 있는 주제가 없다. 설치되어 있는 조형물들도 제각각 자기 주장만 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있던 것도 그러한데 거기에다 형평운동기념탑을 세우고 동기 이경순 시비도 세운다고 하니 더욱 혼란스럽다. 로타리클럽에서 진주시민에게 바쳤다는 비상’, 진주시와 창원지방검찰청진주지청이 세운 청소년 푸른쉼터’, 이갑렬 교수가 만든 십장생’, ‘올라가지 마시오조형물, 서정훈 진주시장 때 세운 인연’, 진주시에서 세운 게 분명한 송죽매공원’, 누군가 갖다 놓은 ’, 형평운동기념탑, 동기 시비. 어지럽다.

 

1980년대, 1990년대에 세운 이 조형물들은 나름대로 뜻이 있다. 그것을 설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진주시민을 위한 그 뜻은 높게 보아 주어야 하고 거룩하게 기록해야 할 것이다. 시비 걸 생각이 없다. 하지만 한번만 더 생각해 본다면, 문화예술의 거리, 남가람 문화거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예술품들도 주제가 드러나도록 설치했으면 좋겠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것을 다시 이리저리 옮기고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누구든 이곳을 지나갈 때 문득 발길을 멈추고 예술품을 감상하게 하려면 지금 이대로는 뭔가 모자란 듯하다. 그리고 청소년들도 읽기 쉽도록 한글로 새로 설명글을 달아주면 어떨까 싶다. 중고등학생 100명을 데리고 가서 설명글들을 읽어보라고 하면 10명이나 읽어낼까 싶다. 부끄럽다형평운동기념탑 설명글은 한글로 썼고 필요한 한자는 묶음표 안에 넣었다. 청소년 푸른쉼터 비석 뒷면 글도 한글로만 썼다


 

근처 식당에서 근사한 반찬과 안주를 차려놓고 오랜만에 만난 벗들과 두 시간 동안 떠들고 놀았다. 1980년대 말 우리가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며 놀았는지 되돌아보고, 다들 아이들은 어떻게 낳아 어떻게 키웠는지 묻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기름지고 유쾌하여 취하는지도 몰랐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식당을 독차지하고 놀았는데, 다른 손님이 다 나가고 난 뒤에는 더욱 크게 웃었다. 오장육부가 한마탕 요동쳤다. 뼈마디와 근육줄기가 죄다 몇 번씩 흔들거렸다. 웃음이 보약이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저녁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쉬어야 할 식당 주인과 종업원에게 미안했다. 그 옆 커피집으로 옮겨 뒤풀이까지 알뜰하게 한 뒤 우리는 헤어졌다. 다시 걸어서 집으로 오는데 빵모자 속 머리카락 사이에도 땀이 솟고 등줄기에서도 땀이 배어나왔다. 배가 부르니 다리는 더 힘들다 하고 낮술에 취했으니 눈은 더 흐리멍덩했다. 12시쯤 진주시청 앞에서 출발하여 집에 도착하니 오후 445분이었다. 긴 여행이었다. 경남문화예술회관 앞에서 잠시 길을 잃은 것을 빼면 꽤 괜찮은 길이다. 술은 금방 깼다.

 

2017.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