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하는 날엔 내 몸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크게 아프지 않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어떤 질병이 내 몸속에 웅크리고 있는지 몰라 조마조마하게 된다. 피 검사, 소변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건강검진을 마치고 한숨 돌린 뒤 오후 네 시쯤 진주성으로 향한다. 천수교 지나 서장대를 쳐다보며 걷다 보면 진주성 서문이 나온다. 참, 촉석문이 정문인 줄 알았는데 공북문이 정문이란다. 얼마전에 알았다. 서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가파르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바로 보이는 게 호국사(護國寺)다. 호국사 안내 표지판은 참 성의 없이 만들어 놨다.
<월경산 호국사. 진주성 서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있다. 이 절 안내 표지판은, 내가 보기엔 좀 성의가 없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은 원래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 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임금께서 호국사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이룩된 것이다.”라고 써 놓았다.
성의가 없다는 것은 자료를 좀더 고증하지 않고 “것으로 전하는”, “였다고 한다”, “것으로 생각되는”, “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근년에” 따위 표현들이다. 좀 무책임하게 쓴 것 같다. 그건 그렇고….
호국사 앞뜰은 고요한 공간이다. 호국사 경내와 바깥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주 섰는데 몇 살이나 될까. 임진왜란을 겪었을까. 한국전쟁은 겪었겠지. 세월의 무상함과 인생의 덧없음을 말해주고 싶었을까. 가을이면 잎사귀를 한 잎 두 잎 떨구어 내는데, 저 많은 잎사귀를 다 떨구려면 얼마나 많은 나날이 필요할까. 내년 봄이면 다시 파릇파릇 피어나겠지만, 늦가을을 보내는 느티나무의 이별의식은 길고도 아쉽다. 많은 관광객과 불자들이 호국사 앞을 지나가고 멈추다 가고 생각하다 가곤 하지만, 느티나무는 말없이 그저 묵언수행을 할 뿐이다. 텅 빈 공간이 주는 느낌은 묵직하다.
<호국사 앞 느티나무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용케 이겨내고 오늘날에도 무수한 잎사귀를 피워낸다.>
호국사 옆에는 창렬사(彰烈祠)가 있다. 창렬사는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산화한 장수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에 사액을 받은 사당이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임진왜란 당시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위패를 이곳 창렬사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창렬사에는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셨고,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 순국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린다. 창렬사는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다음 백과 참조)
대아고등학교 학생들은 1967년부터 매주 일요일 아침 창렬사에 모신 영령들을 참배했다. 참배뿐만 아니라 청소도 했다. 청소는 창렬사 내부에서부터 바로 근처 호국사 앞마당까지 해야 했다. 대아고는 이를 ‘애향심과 함께 호국정신을 기르면서, 학생들의 정신 수양을 쌓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대아고 졸업생들은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창렬사 참배를 꼭 이야기한다. 창렬사 참배를 맨처음 시작한 강영규 전 교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문제학생’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하는 데에서 참배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처음엔 호국사에서 시작했는데 다른 종교를 가진 부모들의 반대로 창렬사로 장소를 바꿨다. 창렬사 참배 이후로 퇴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고도 강조했다. 대아고가 창렬사 참배를 시작한 계기는 좀 의외지만, 그 결과는 아주 훌륭했던 듯하다.
인문계 고등학생이라면 일주일 내내 얼마나 많은 학습에 시달렸을까. 아침 6시쯤 대문을 나서 학교버스를 타고 등교하면 밤 10시 30분까지 작은 걸상에 걸터앉아 영어, 수학 문제를 풀어야 했다. 영어 단어 외운 것, 수학 문제 푼 것을 연습장에 써서 다음날 아침마다 제출했다. 일명 ‘자습지’라고도 하고 빽빽하게 쓰지 않으면 혼난다고 하여 ‘빽빽이’라고도 불렀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뒤 일요일이 되면 늘어지게 자고 싶은 게 어린 학생들의 소망 아니었을까. 물론 모든 학생이 매주 창렬사를 참배한 건 아니다. 학년별로 반별로 순서를 정하였는데, 한 학생이 3년 동안 10번 가량 참배했던 듯하다.
<창렬사에서 북장대로 가는 길. 중간에 진주성 포루가 있고, 진주사랑나무라는 것도 있다. 이 길에서 바라보는 진주박물관 부근과 성 바깥 풍경은 일품이다.>
1983년부터 3년간 나는 대아고등학교 학생이었다. 당시 우리집은 장대동에 있었다. 창렬사 가는 날이면 일요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6시께 눈을 뜬다. 창렬사까지 걸어가면 30분쯤 걸린다. 마당 구석에 세워 놓은 대빗자루를 들고 부지런히 걸었다. 시내버스가 다니기 시작하고 부지런한 택시 기사도 시내를 질주한다. 대아고의 전통을 아는 사람들은 ‘아, 대아고 학생이 창렬사 청소하러 가는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저 녀석은 일요일 아침에 빗자루 들고 어딜 가는 거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창렬사에 도착하면 먼저 나와 계신 선생님들이 이리저리 청소를 시킨다. 고즈넉한 호국사와 엄숙한 창렬사 주변이 비질 소리에 부산스러워진다. 늦게 왔다고 꾸지람하는 소리, 간밤에 있었던 이야기하느라 친구끼리 시시덕거리는 소리, 잠이 덜 깨 하품하는 소리들로 왁자지껄해진다. 이윽고 청소가 끝나면 창렬사로 올라간다. 장난치고 농담하고 떠들던 친구들도 일순 조용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다 장렬하게 산화해간 영령을 모신 사당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호도 외쳤는데 “정의롭게 살자! 봉사하자!”가 그것이다.
아인 박종한 교장선생님은 늘 강조하셨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킨 것은 김시민 장군을 위시한 몇몇 장수들만의 노고가 아니라, 진주성에 살던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힘껏 싸운 덕분이다. 우리는 몇몇 장수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이름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영령들을 함께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 선생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선생님은 “우리가 충무공 탄신일에 행군을 하는 것은 모함에 의하여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에서, 엄청난 분노와 억울함을 모두 던져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순정(純情)한 마음으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신 그 뜻을 기리기 위해서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명예나 명망을 좇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겠다는 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 창렬사 참배였던 것이다.
<대아고등학교 50년사>에서 한 부분을 옮겨 놓는다.
창렬사는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으로, 함께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위패는 없었다. 어느날 한 학생이 박종한 교장에게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7만 민관군이 순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양민들과 병사들의 위패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박종한 교장은 한 학생의 물음에 민성과 민족교육을 위해 창렬사 참배와 주위 청소를 시키는 선생으로서 답변할 수가 없었다. ‘양반으로 태어나야 대접받지 졸병으로 태어나면 죽어서도 물 한 잔도 못 얻어먹는다라고 교육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래서 박종한 교장은 창렬사 관리인에게 7만 명 전몰 위패 하나를 만들라고 민원을 제기했다. 몇 번의 민원으로 돌에 새긴 위패를 창렬사 계단 옆에 세워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술 한잔 받아 먹지 못하면서 신분 계급의 설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생각 없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그후 다시 몇 번의 민원을 제기하여 다행히 창렬사 안에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142쪽)
그럼에도 우리는 일요일 오전 한두 시간을 뺏겨야 한다는 것에 더 관심이 컸던 것 같다. 요즘도 대아고의 창렬사 참배는 이어지고 있다. 요즘은 토요일에 가는데 빗자루는 들고 가지 않는다. 그냥 교복 입고 맨몸을 달려가서 청소하고 묵념하고 선생님 말씀 들으면 끝이다. 그래도 30-40분 동안 나라를 생각하고,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앞으로 살아갈 교훈이나 좌우명 같은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까. ‘정의롭게 살자, 봉사하자’ 같은 구호를 외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가짐을 잠시나마 가져보는 것은 청춘의 학생들에게 꽤나 좋은 교육일 것이다. 기회 되면 토요일 아침 운동 삼아 한번 가봐야겠다.
창렬사 근처에 ‘진주성 포루’도 있다.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이다. 원래 진주성 내외성에 12좌가 설치되었는데 1969년 진주성 복원 당시 상징적으로 1곳만 복원했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세 종류가 보인다. 저 포를 쏘아 적을 쓰러뜨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모든 재래식 무기는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특히 포는, 요즘 포와 비교되어서 그런지 오히려 칼이나 활보다 더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 저렇게 생긴 무기로부터 발사된 탄환을 맞고 죽는다면 좀 억울할 듯하다.
북장대 앞에는 ‘운주헌터’(運籌軒址)가 있다. 운주는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이란다. 운주헌은 조선시대 통제사와 병사의 집무실 명칭이다. 잘 모르던 곳이다. 그 유래와 역사를 적은 표지판을 읽다가, ‘나는 진주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진주성을 모르고서야 진주를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진주 역사를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갈 길은 아득하다. 그 근처에 있다는 ‘김해김씨비각’은 찾지 못했다. 있는데도 못 알아본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다시 가봐야겠다.
<진주성은 진주시민의 보물이다. 계절 따라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 넓지 않은 데도 곳곳에 역사와 문화 유적이 널렸다. 공부할 거리가 아주 많다.>
10월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진주성은 아름답다. 나무들은 노랗게, 누렇게, 발갛게, 빨갛게, 샛노랗게, 노르스름하게, 발가스름하게, 벌거스름하게 물들어가고 있다. 어떤 나무는 숫제 아직 봄이다. 파릇파릇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정말 그런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면 진초록에서 연둣빛을 잠시 보여주다가 노랗게 물들어가는 참이다. 마지막 온 힘을 쏟아낸다고 해야 할까.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사실도 아니고 진리도 아님을 깨닫는다. 도토리 줍는 아주머니, 긴의자에 붙어 앉은 연인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계절이다. 진주박물관 너머 칠암동, 그 너머 문산 월아산을 바라보며 걷는다.
2017.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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