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정기건강검진을 한다. 엊저녁 7시 30분경 저녁을 가볍게 먹은 뒤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한일병원 응급실을 다녀왔을 때, 정말 목이 말랐지만, 그래서 깡통맥주 하나라도 따고 싶었으나 참았다. 애써 날 잡고 휴가 내놨는데 이번에도 못하면 해를 넘길 것만 같아서였다. 검진을 해야 하는 해가 되면(홀수 해) 3월에 해야지, 5월에는 해야지, 7월에는 꼭 하고 말 거야, 9월을 넘기면 안 돼… 수없이 다짐하지만 결국 11월 목전에 병원을 간다. 늘 이 모양이다.
상대적으로 아침 여유가 생긴 덕분에 아내를 출근시키고 병원에 도착하니 8시 10분이다. 번호표를 먼저 뽑아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3번이다. 안내글을 자세히 읽어보니 몇몇 약은 반드시 먹고 오고, 당뇨병 약은 반드시 먹지 않고 와야 한단다. 아뿔싸. 급히 집으로 와서 혈압약 한 알을 먹고 다시 병원으로 간다. 그래도 내 3번은 변함이 없다. 검진은 9시부터 할 것이므로. 일반적인 문진표를 대강 작성하고 위내시경 신청서도 작성한다. 그새 열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다.
8시 50분이 되자 예쁜 분홍색 옷을 입은 간호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번호를 부른다. 그 와중에 개별적으로 질문을 하려는 사람이 새치기를 하기도 한다. 간단한 것부터 먼저 묻고자 하는 사람이 없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럴 때마다 간호사들은 단호하게 번호표 뽑은 뒤 기다리면 순서대로 문진표 작성을 도와줄 것이라며 제지한다. 간호사는 아주 빠르게 묻는다. 미리 한번 읽어본 게 아니라면 아무리 머리 좋은 젊은 사람이라도 더듬거릴 듯하다. 주량, 흡연, 운동, 암 등의 가족 내력, 나의 병력 따위를 일사천리로 묻고 나는 떠듬떠듬 대답한다. 수면내시경을 하면 6만 원인데 용종이 발견되거나 하면 2만-3만 원 정도 더 내라고 할 수도 있다고 일러준다. 그러고 나서 오줌을 조금 받아 제출하고 앉았으니 나를 부른다.
허리둘레는 33이란다. 34쯤 될 줄 알았다. 배에 힘 준 건 아니다. 요 몇 달 동안 석갑산이라도 오르내린 게 도움이 되었을까 싶다. 몸무게는 엊그제 목욕탕에서 잰 대로 63kg이 나온다. 64kg을 넘기던 게 지난해 말 올해 초였다. 60kg까지 줄이는 게 나름 목표인데, 아직은 멀었다. 키는 164cm라고 한다. 내가 “1cm 줄었는데?”라고 눙치자 씩 웃고 만다. 귀가 정상인지 간단히 재고 시력도 잰다. 요즘 시력이 많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뜻밖에 두 눈 다 1.2가 나온다. 안경점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아직은 괜찮은가 보다. 가슴 엑스레이를 찍고 나니 절반은 진행한 듯했다.
이후 내가 스스로 찾아가야 할 순서도와 내용를 건네 준다. 1층 수납 6만 6770원, 2층 진단검사실(채혈, 심전도), 2층 내시경실까지가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치과도 적혀 있기는 했지만 갈 필요는 없다고 한다. 얼른 1층으로 간다. 돈부터 내어야 건강건짐을 해주겠다는 데에서 잠시 고개를 갸웃한다. 병원도 돈벌이이니 할 수 없다 여기며. 카드부터 꺼내는데, “아버님 번호표 뽑고 잠시 기다리세요!”라고 한다. “아버님”이라니. 그것 참. 참... 우리 아이 너덧 살 때 소아과 업고 갔다가 젊고 예쁜 간호사가 “아버님”이라고 불렀을 때 참 묘하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런 소리 들을 나이가 되긴 되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2층 진단검사실에서는 왼쪽 팔뚝에서 피를 뽑는다. 상냥하게 웃으며 이름을 한번 더 확인한다. 심전도실에 들어가 가슴 위까지 옷을 올리고 드러누웠다. 텔레비전 뉴스를 켜놨다. 1분 정도 눈을 감았는가 싶은데 “다 됐습니다. 내시경실로 가세요.”라고 깨운다. 정말 찰나의 수면에도 정신이 좀 맑아지는 듯하다. 밤새 꾼 꿈과 건강검진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은 심장이 제대로 작동을 했을지 걱정된다. 내시경실에 가니 기다렸다는 듯 웬 약을 먹이고 이것저것 묻더니 바로 검사실로 들어가라고 한다. 어떤 때는 30분 정도 기다린 적도 있는데. 모로 누워 입을 벌렸다. “자세가 좀 불안한데요?”라고 했더니 그게 정상이란다. 손등에 바늘을 꽂고, 입에 뭘 물리고, 잠시 후 시원한 액체가 팔목을 따라 흐르고, 다시 잠시 후 좀 아프게 스며드는 액체를 느낀 듯한데, 기억이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30분은 더 흐른 것 같고 1시간은 좀 안 된 것 같다. 눈을 떴다. 내시경실 바깥에 줄지어선 침대 맨 첫 칸에 내가 누워 있었다. 일어났다. 조금 어지러웠다. 몇 번 해본 터라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간호사가 다가오더니 좀더 누워 있으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걸어나가서 담당 내과과장에게 등록을 해놔야 상담시간을 덜 기다린다는 것을 안다.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꿈지럭꿈지럭 움직여 아주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내과1과장실에 등록을 했다. 나 앞에 10명의 이름이 있었다. 의사는 외래 환자를 보다가 건강검진 환자를 보다가 다시 내시경실로 달려가서 한두 명을 검사하고 달려오는 일을 되풀이했다. 갈 때마다 보는 풍경이다. 거의 1시간 가까이 기다리니 내 이름을 부른다. 그 1시간은 참 길다. 혹시 용종이 나왔을까. 뭔가 이상한 게 발견되지 않았을까. 조직검사를 한다고 해 놓고 한 달 뒤, 또는 두 달 뒤 다시 오라고 하지 않을까. 술을 완전히 끊으라고 하지 않을까. 곧장 입원을 해야한다고는 하지 않겠지. 중죄를 저지르고 재판을 받는 피고인의 심정이 이럴까. 온갖 상상을 다 해 본다.
“이우기 님 맞죠? 식도, 위, 십이지장 죽 봤는데요, 별것 없습니다. 위염이 아주 조금 있는데, 뭐, 큰 건 아니고요. 물을 많이 드세요. 술, 담배, 커피, 짠음식, 자극적인 음식 줄이시구요. 물을 많이 드세요. 됐습니다.” 불과 1-2분 만에 끝났다. ‘용종이나 조직을 떼어냈으니 2만-3만 원 더 결제하고 다음주에 결과를 보자’고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물론 가슴 엑스레이, 소변검사, 피검사의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므로 어찌될지 모른다. 심전도까지 포함하여 종합적인 소견은 한 달 쯤 있으면 나에게 배달되어 올 것이다. 그때 재검하러 오라고 할 수도 있고, 무엇무엇 조심하라고 경고장을 날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 어른이라면 으레 있을 수 있는, 주로 술과 안주와 관련 있는, 결과는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열 달 가량 버티고 개기고 미루던 건강검진을 하였다. 오늘은 치과는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대장내시경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해여서 더욱 쉽게 끝난 듯하다. 치과는 어차피 며칠 내로 치료를 시작해야 하고 대장내시경도 내년쯤에는 꼭 해야 할 듯하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지만, 사는 동안에는 건강하자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는 것이다.
착한 모범생처럼 인사 올리고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올랐다. 웃음이 나왔고 뒤이어 긴 한숨이 나왔다. 우체국에 가서 볼일 보고 본죽 가서 새송이소고기죽을 사서 집으로 왔다. 두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한 채 숟가락을 놓는다. 입맛이 없어서도 아니고 밥맛이 없어서도 아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허로움이랄까 허탈함이랄까 공허함이랄까 뭐 그런 감정이 두어 번 머리에서 가슴을 휘젓고 지나간 것이다. 더 잘살려고 바둥거리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벌려고 버둥거리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검사 하나를 두고도 열 가지 스무 가지 생각을 다 하고야 마는 새가슴 내 가슴이 안타까워서이리라.
이렇게 건강검진이라는 제도가 생긴 뒤 큰병을 미리 발견하여 조기에 치료함으로써 생명을 구한 사람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특히 위암, 대장암, 갑상선암, 유방암 같은 건 빨리 발견하면 할수록 생존율이 높다고 한다. 그 외에도 조금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좀 경건하고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건강검진이기도 하다. 술, 담배를 가까이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건강검진이라는 제도 앞에서 겸손해지고 얌전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담배를 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랴!
기왕 건강검진을 할 것이라면, 현재 먹고 있는 혈압약에 대해서도 길게 이야기해보고 싶었고(이건 다달이 가는 내과원장과 그런대로 충분히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폐암으로 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병력이나 저혈압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로부터는 유전되는 게 없을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가물가물 잘 잊어버리는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좀 있고(다들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만 그런 것인지 등), 오늘 측정하기로는 1.2로 나왔지만 노안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내 눈알을 믿어도 되는 것인지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죄다 물어볼 양이면 따로 주치의를 두어야겠지, 생각하며 그래도 다달이 건강보험료를 내어왔으니 이렇게라도, 억지로라도, 기본적으로라도 검사를 해보는 게 어디야,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고 나면 이렇게 후련하고 이렇게 깨반한 것을 왜 그렇게 미루고 버티고 개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2017.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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