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오후 5시 40분. 퇴근 시간이라 하기엔 좀 이르고 열심히 일할 시간이라 하기엔 늦은 시간이다. 진주 하대동 홈플러스 앞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버스 도착 시간을 알리는 기계엔 10분 뒤에 261번이 온다 하는데, 그 차가 어디를 가든지 일단 탈 생각이었다. 어차피 한번은 갈아타야 하니까. 하지만 버스는 15분쯤 지나서 온다. 정류장에서 손님 타고 내리는 시간, 신호등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지 않고 단순히 거리만 재어서 시간을 안내해 주는 것 같다. 그런 줄 짐작하고 있으니 헷갈리진 않는다.
무심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다. 무엇을 찍고 싶었을까. 찍은 뒤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한글과 영어가 보이고, 우리말과 외래어(외국어)가 보인다. 한글은 ‘사우나, 디지털 프라자, 상대점, 바운스, 하궁 노래방, 모텔, 삼성전자 코리아 세일페스타, 루소, 무인’ 따위다. 영어는 ‘Home plus, SAMSUNG, MOTEL, e, EXR, LIVE CLUB, KOREA Sale FESTA’ 따위다. 우리말은 ‘1년에 단 한번! 특별혜택, 노래방, 무인’이 보인다. 외래어는 ‘사우나, 디지털, 프라자, 코리아 세일 페스타, 모텔, 바운스, 루소’ 따위다. 이것저것이 적당하게 잘도 섞였다. 세계화가 잘 이루어져 가는 도시답다.
삼성전자에서 만든 갖가지 전자제품을 파는 곳이 ‘디지털 프라자’이다.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에서부터 휴대전화까지 다양한 제품이 모여 있는 곳이다. ‘코리아 세일 페스타’라는 기간을 이용하여 좀 싸게 판다고 자랑해 놨다. 그건 잘하는 일이라고 본다. 정확한 통계는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 전자제품 회사들은 외국에 가서는 엄청 싸게 팔고 우리나라에서는 반대로 너무 비싸게 판다는 비판이 있어 왔다. 국민을 ‘호갱’으로 본다는 야유도 있었다. 그래도 눈도 꿈쩍하지 않다가 나라에서 물건값을 대대적으로 깎아 파는 행사를 한다 하니 생색내고 있다. 그래도 고맙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프라자’라는 말은 잘못 적은 것이다. ‘plaza’라는 영어를 옮겨 적은 것이다. ‘plaza’는 광장, 서비스구역, 시장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련된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도록 관련 회사나 점포들을 한데 모아 놓은 곳’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에는 올려져 있지 않으니 외래어가 아니라 외국어이다. 외래어(외국어)도 외래어표기법에 맞게 적어야 한다. ‘plaza’는 ‘플라자’로 적어야 한다. 삼성전자는 이 사실을 알까, 모를까.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적어라. 우리는 우리 식대로 적는다’ 이런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그렇게 의심하는 건 전혀 합리적이지 않지만, 그동안 삼성이라는 기업이 해 온 일을 보면 턱없는 상상만은 아닐 듯하다. 이 정도 기업이라면 국민들의 말글살이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해외에 나가서 물건을 팔아야 하니 외국어를 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국내에서 파는 물건이나 홍모물 같은 데엔 우리말 우리글을 바르고 정확하게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두 아주머니 이야깃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엔 버스가 참 안 오더라.” “그렇제. 차가 와 이리 안 오노?” 버스 두 대가 잇따라 도착했다. 나는 뒤차를 탔다. 앞차 261번은 학생들이 빽빽했고 뒤차 263번은 아주 널널했다. 덕분에 편안하게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버스 노선을 다시 조정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과연 어떻게 바뀌어갈지 지켜보기로 한다. 시민들의 아우성을 늦게나마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해야겠지. 진주시는 엊그제 ‘시내버스 노선 개선단 위촉식’을 했다. 언론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시민여론을 대표할 수 있는 민간인 8인의 위원들로 구성돼 노선개편에 따른 전문성 확보와 함께 시민들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반영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뉴시스)라고 보도했다. 정말 이번에는 기대해 본다.
버스는 뒤벼리를 신나게 달린다.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승용차를 향하여 미리 ‘빵빵’ 경고음을 날려준다. 동방호텔 앞 신호등에서 잠시 멈춰선 사이 진주교, 진주성 방향으로 눈길을 돌린다. 아름답다. 그 어떤 화려한 유등도 하늘이 만들어내는 저녁놀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것 같다. 진주교 논개 가락지를 비추는 불빛은 따뜻하다. 시외버스정류장 근처에서 내려 진주성 쪽으로 걸어갔다. 삼사십 분 정도 걷기로 했다. 진주교 밑을 지나 촉석문을 통과하여 어둠 내린 진주성을 걷는다. 시끌벅적했던 축제가 끝난 진주성엔 고요함과 차가워진 바람과 따뜻함을 붙들고 있는 가로등만이 이따금 지나가는 손님을 맞이한다.
2017.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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