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시골에 살 때 이야기다. 국민학교 3~4학년이었을까.
동네에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얼굴이 하얗고 단발머리를 한
예쁜 여자아이 하나가 나타났다. 옷도 흰옷만 주로 입었다.
매일 보던 옆집 앞집 명숙 명자 미선 미자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윤초시 손녀 같다고 할까.
또래 아이들은 소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어려웠다.
만나기도 힘들었고 서울서 온 소녀가 쓸 표준어가 두려웠다.
그래서 꾀를 낸다는 것이 고작 "야! 호박 같은 가시나야?"라며
놀리는 것이었다. 호박은 우리가 생각해낸 가장 못난 그 무엇이었다.
그 집앞을 지나가다가, 그 집에 심부름을 가다가 또는...
우연을 가장하여 일부러 그녀 앞에 쓱 나타나서는
"야이, 호박 같은 가시나야~"하고 달아나곤 했다. 쾌재를 부르며.
할머니가 모를 리 있겠나. 한번은 애들을 불러 모아 놓고서는
"야 이놈들아, 우리 손녀가 왜 호박 같나? 그러면 네놈들은
외 같은 머시마다."라고 꾸지람을 하셨다. 외는 오이를 말한다.
요즘 쉽게 먹는 오이 말고, 시골 텃밭에서 자라는 오이 말이다.
그 오이는 밋밋하고 누렇고 싱겁다. 한마디로 볼품없다.
나는 꾸지람을 들은 뒤부터 "호박같은.." 욕을 더이상 못했다.
볼품없는 것으로 지적당한 데 대한 부끄러움도 있었을 것이고
우리는 장난으로 그랬지만 소녀에게는 큰 아픔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하게 된 것이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눈길 한번, 손짓 하나, 발걸음 한번...
이 모든 것이 간단하고 단순하며 별 의미없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누군가는 그것으로 크게 기뻐할 것이고
누군가는 슬퍼할 것이고, 누군가는 오해를 할 것이고
누군가는 삶의 새로운 의욕을 얻을 것이고, 그리고
누군가는 평생 시퍼런 멍을 가슴에 안고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거창한 것까지 느끼지는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철없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하얀얼굴의 서울 소녀는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안간 숲골이라는
'대단한' 촌구석에서 당한 유년의 재미없던 그 추억을...
2014.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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