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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좀도둑은 듣거라

by 이우기, yiwoogi 2013. 9. 14.

9월 13일(금) 오후 1시~2시 사이에 진주시 옥봉동 중앙교회 옆
어느 집에서 검은색 볼품없는 가방을 훔쳐간 좀도둑은 듣거라.

그 집이 대문, 현관문, 방문, 다 열렸다고 너의 집 아니었고
그 가방이 할머니 머리맡에 던져둔 듯해도 너의 가방 아니었다.

73살 할머니는 새벽부터 오전 내도록 옥상 고추 따고
김치 담그고 이일저일 하느라 하도 곤하여 주무신 것이었고,...
너 같은 놈 마음대로 집안 드나들라고 눈감고 있었던 것 아니었다.

보기엔 그렇게 보여도 그 가방에는 할머니의 삶이 다 들어있다.
추석장 보려던 지폐도 들었고 막걸리 사먹고 남은 동전도 있었다.

돈뿐이면 내가 이러겠느냐.
할머니 친구, 친척 연락처 깨알같이 적은 작은 수첩도 있고,
아들, 며느리들 집 전화번호와 핸드폰 번호 담긴 2G 핸드폰도 있다.

도장도 있고, 병원카드도 있고, 아들이 맡긴 신용카드도 들어있다.
노인대학 학생증도 있고, 주민등록증도 있었다.

그런 가방을 훔쳐 달아났으면, 그래 돈은 네놈이 다 쓰라.
신용카드는 이미 정지됐으니 쓸모없겠지. 그것 말고,
도둑놈 너에게 필요한 게 무엇 있느냐, 그딴 것을 어디에 쓰려느냐.

그러니 그 가방을 아무도 안 볼 때 다시 그 집 마당에 갖다놔라.
다시 도장 파고, 주민증 만들고, 인감 바꾸고, 은행 가서 도장 바꾸고,
다리도 아프고, 혈압도 높은 할머니가 얼마나 귀찮겠느냐!

너를 본 사람이 많다.
엊그제 그 집 근처 골목에서 서성이는 너를 본 사람이 있고,
어제 남의 집 마당에 설사를 하려다 들켜 쭈삣쭈삣 도망가던 너를 본 사람도 있다.

호리호리한 큰 키에 모자를 눌러썼지만,
다리에 흉터가 많은 너를 분명 본 사람이 있다.
도둑질을 한 그 동네에 다시 한번 나타나겠지.
그때 너를 만나면 그냥 안 두겠다고 눈알을 부라리는 아줌마, 아저씨가 많다.

경찰에 신고했으니 순찰을 도는 경찰차들이 너를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는 버릇이 나쁜 다른 친구 한놈과 짝패겠지. 그러니 더 잘 잡힐 것이다.
어디 지문도 묻혀놨을 것이니 반드시 한번은 잡힐 것이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님을 알겠지.

그러니 좀도둑은 듣거라.
훔친 돈으로 뭘하든 묻지 않겠다. 다만, 그 할머니 가방은 곱게 돌려드려라.
안 그러면, 날마다 꿈자리가 사납고 언제 어디서 비명횡사할지 모른다.
오늘 번개와 천둥을 못 보고 못 들었느냐, 길가는 차들이 두렵지 않느냐.
산사태와 눈사태, 홍수와 벼락이 남의 일 같으냐.

그러니 좀도둑은 듣거라.
주민증, 도장, 수첩, 핸드폰은 꼭 돌려드려라.
한때 눈이 멀어 돈을 훔친 것은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를 귀찮게 하고, 씁쓸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두렵게 하고, 무섭게 하고, 세상에 대해 실망하게 하고, 그래서 혼자 밤에 주무실 때 문을 더 꼭꼭 잠그게 한다면, 그건 용서받을 수 없다, 절대로.

그러니 좀도둑은 듣거라.
할머니의 삶이 오롯이 담긴 그 귀한 것들은 하루빨리 돌려드려라.
그것이 나중에 니가 붙잡혀 감옥 갈 때, 형사님들께 뒤통수 얻어맞을 때, 감옥에서 고참에게 신고식할 때
몸은 고달파도 마음이라도 조금 편안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알겠느냐, 좀도둑아. 야이, 나쁜 놈아!
그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시다. 이 나쁜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