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
진주시 미천면, 지금 큰집이 있는 안간에서 아버지는 아들 넷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태어난 마을은 ‘숲골’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임곡’(林谷)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숲이 우거진 살기 좋은 동네, 인심 좋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아버지는 어릴 적, 그러니까,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 갔다 오면 소 꼴 베러 가는 게 일이었다. 가방을 던져놓고 낫과 비료부대를 들고 논밭으로 나가 풀을 베어와 소를 먹이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낫에 손을 베이기도 하고 숲속을 지나가는 뱀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 지금 생각하면 다 추억이지만 그때는 얼마나 무서웠던지….
밤에는 호롱불 켜놓고 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했다. 지금 형광등보다 훨씬 어둡고 촛불보다도 더 어두운 불빛에서 삐뚤삐뚤 글씨를 쓰곤 했지만 그래도 공부는 잘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다을이의 할아버지는 늘 공부 그만하고 얼른 자라고 하실 정도였다. 그런 날 밤이면 할머니는 소 여물 끓이고 남은 불씨에다가 고구마를 구워 간식으로 갖다 주곤 했다. 그 고구마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여름이면 동네 개울에 몰려가 발가벗고 물놀이를 했는데 아버지는 겁이 많아 깊은 물은 근처에도 못 갔고 그냥 얕은 개울에 발을 담그고만 있었다. 겨울에는 꽁꽁 언 개울에서 썰매놀이를 즐겼는데 두껍지 않은 얼음이 깨져 양말과 신발을 몽땅 적신 뒤 불을 피워 말리다가 태워먹은 적도 있다. 그래놓고는 어머니께 혼날까봐 집에 일찍 들어가지도 못하고 밤이 늦도록 동네를 쏘다니기도 했지. 연날리기와 팽이치기도 추운 겨울을 이기게 해 준 놀이였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갈 때 집이 진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정든 고향과 작별하고 학교도 전학을 했다. 진주에서는 낯선 친구들과 친해지고 잘 모르는 길을 익히느라 즐거운 추억을 만들지 못했다. 진주에 오니 우리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돈 따먹기를 하는데, 나는 밑천이 없어 감히 끼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어쩐지 어린이들이 돈 따먹기 하는 게 못마땅하여 일부러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아주 잘한 것 같다.
요즘도 간혹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고향의 봄’이란 노래가 나오면 어릴 적 우리집 마당 가에 높이 서 있던 감나무 밑에서 감또개 주워 먹던 일이 생각난다. 이웃집 뒷담 옆에 섰는 아름드리 굴밤나무 아래서 굴밤 줍다가 그 집 할배한테 들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던 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어느날 학교 가려고 옷 입던 중 이웃 아저씨가 사진기를 새로 샀다고 와서 자랑하던 끝에 수돗가 석류나무 아래 네 형제를 세워 놓고 찍은 사진은 지금 할아버지 집 사진첩에 꽂혀 있다. 사진이 귀하던 시절이라 아버지의 초등학교 적 천연색 사진은 그것뿐이다.
집 바로 옆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그 옆으로 대나무밭 또 그 옆으로 야트막한 산이 있었는데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어린 마음에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는 했는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아버지 나이 벌써 마흔을 훌쩍 넘어버렸으니 그럴 만한 때도 됐다. 하지만 우리 아들 다을이를 보면, 다을이의 재롱을 보면 언제나 새로운 힘이 샘솟듯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다니는 아들의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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