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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미복귀 휴가 신고합니다

by 이우기, yiwoogi 2022. 3. 17.

미복귀 휴가 신고합니다

더운 여름이었으나 마음은 서늘하였습니다.
숟가락을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한 번 안아주지도 못한 채 달려가는 아들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야구모자를 쓴 신병들 가운데 등산 모자를 쓴 아이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첫 효 전화를 실패한 몇 안 되는 훈련병이었습니다.

원하지 않은 특기를 받았으나
전화위복, 가장 가고 싶던 자대로 배속되었습니다.
집에서 부대까지 30분이면 넉넉했습니다.
휴가는 네 번 나왔습니다.
그중 한 번은 할머니 사망으로 인한 청원 휴가였습니다.

내무반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군대 계급을 사람됨의 등급으로 보는 선임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잘 이겨내었습니다.
부모 된 우리는 알면서도 스스로 참아야 했습니다.

입대 후 명절은 네 번 지나갔고 계절은 일곱 번 바뀌었습니다.
코로나에 쫓겨 입대했는데 코로나는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휴가를 미루고 포기했습니다.
덕분에 만기보다 66일 앞당겨 3월 18일 미복귀 휴가를 나옵니다.
내일 아침 점호 끝나면 예비군 모자 쓰고 나올 겁니다.
저는 휴가를 내어 부대 앞으로 달려갈 겁니다.
환영 현수막도 준비했는데 펼칠지 말지 모르겠습니다.

군대에서 많은 걸 배우고 느꼈을 것입니다.
어떤 것은 인생을 바르게 이끌 금과옥조일 겁니다.
어떤 것은 따라 배우지 않아야 할 반면교사일 겁니다.
나라와 부모와 친척과 이웃을 대하는 마음도 배웠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더 크게 펼쳐질 인생의 설계도도 그렸기를 바랍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배우거나 느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무사하고 무탈하게 건강히 돌아오는 것이 최고입니다.
아들과 함께해준 동료들과 선임들과 후임들이 고맙습니다.
부대 간부들께도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같은 날 입대한 공군 817기 아들들 모두 건강히 돌아오기를 빕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들을 환영합니다.
건강하게 부모 품에 안길 모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공군 817기로 만나거들랑 반갑게 악수하기를 바랍니다.
한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울고 웃었음을 기쁘게 추억하기를 빕니다.

훈련병 때부터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평소 하지 못한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외롭거나 심심하지 말라고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100통이 목표였는데 결국 90통에서 멈추었습니다.
그 편지들을 한데 모아 419쪽 책 한 권으로 묶었습니다.
아들에게 주는 아비의 전역 선물입니다.
긴 인생에서 실낱같은 교훈이라도 건진다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모 자식 관계를 새롭게 맺을 겁니다.
비로소 마음을 놓으면서 다시금 긴장하는 까닭입니다.
감사합니다.

2022. 3. 17.(목)
이우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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