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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 퍼나른 글 모음

한글날에 생각해 본다ㆍ3

by 이우기, yiwoogi 2014. 10. 9.

한글로 적기의 규칙성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어를 정말 못했다. 지금도 못한다. 원래 내 머리는 외국어를 거부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학창 시절에 그것은 정말 부끄럽고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냥저냥 견딜 만하다. 그러면서 내가 왜 영어를 못하는지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럴듯한 까닭을 찾아냈다.

한글에서는 ‘ㅏ’는 언제나 ‘ㅏ’이다. 아기, 아버지, 나무, 학교에 나오는 ‘ㅏ’는 ‘ㅓ’나 ‘ㅗ’로는 절대 발음되지 않는다. 자음도 대단히 규칙적이다. ‘ㄱ’이 ‘ㅋ’이나 ‘ㄲ’로 발음되는 경우는 없다. 사람에 따라 조금 된소리처럼 말하거나 거센소리처럼 말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래서 한글은 조금만 깨치면 규칙대로 적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영어는 그렇지 않다. 영어 시험지를 받아들면, 1번부터 5번 사이 문제는 발음과 높낮이(엑센트)를 묻는 문제가 나온다. 나는 여기서부터 숨이 턱 막혀버린다. ‘father’에 나오는 ‘a’와 ‘made’에 나오는 ‘a’가 왜 다르게 발음되어야 하는지 까닭을 모르겠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늘이 왜 하늘이냐고 묻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외워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규칙에서 벗어난 몇 가지 예외를 외우는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엔 거의 모든 단어의 발음을 하나하나 외워야 하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도 없잖아 있겠지.) 아무튼 50문제 가운데 5번까지 푸느라 시간을 다 보내곤 했다.

고등학교에서 불어를 배우게 되었다. 불어 선생님은 첫 시간에 영어에 자신 없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불어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는 언어이다”라고 선생님은 선언했다. 그 말씀이 옳은지 그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분명 힘과 용기를 준 것 같았다. 영어는 50점으로 주요 과목이고 불어는 20점으로 주요 과목이 아니었지만 난 불어에 더 관심을 쏟았다. 영어는 애당초 포기했으니. 불어는 영어에 견주어 말과 적기 사이에 규칙성이 아주 높았다. 어말 자음은 묵음이라는 둥 몇 가지 납득이 안 되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비겁하게 단어 속 모음 밑에 밑줄을 그어 놓고 발음이 다른 것은 어느 것이냐 묻는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한글의 표기 체계는 세계 어느 문자에 견주어도 확실히 뛰어나다. 글자는 말을 적는 수단이니 말과 글자 사이에 규칙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말하는 대로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를 배우기 쉽게 하고 읽기 쉽게 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것은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인도 어느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적을 문자로 한글을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다. 유네스코가 문맹률을 낮추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나 단체에 주는 상 이름이 ‘세종대왕 상’(King Sejong Prize)인 것은, 한글이 쓰기 쉽고 배우기 쉽고 따라서 그만큼 체계적인 문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의 ‘손바닥 아픈 이야기’를 2012년 4월 <경남일보>에 실은 적이 있는데, 부끄럽지만 여기에 연결해 놓아 본다.http://goo.gl/VT0wix


2014.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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