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갖고 놀던 ‘구슬’을 우리는 ‘다마’라고 했다. 다마가 일본말이란 건 한참 뒤 알았다. 아이들은 다마치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종이를 접어 만드는 ‘딱지’는 ‘때기’라고 했다. 때기치기도 어깨가 아프도록 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밥 먹으러 오라고 어머니가 찾아 나서고서야 우리는 다음날을 기약하며 헤어지기 일쑤였다. 구슬은 친구 것을 따지 않는 한 돈으로 사야 하는 것이었고, 딱지는 여차하면 ‘동아전과’ 한 권을 도륙내어 하나하나 접어 200개 남짓을 하루 만에 만들기도 했다. 구슬과 딱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친구 사이에 큰 자랑거리였다. 많이 딴 날은 괜히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구슬과 딱지를 비닐봉지에 싸고 작은 나무상자에 넣어 집 뒤 대밭 속에 묻어두곤 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노상 구슬과 딱지만 갖고 노는 아이를 예쁘게 봐줄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대밭에 조그마한 구덩이를 판 뒤 나의 보물을 묻고는 아무도 모르게 표시를 했다. 필요할 때 끄집어내기 좋도록 하는 잔꾀도 부렸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진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나의 보물상자에는 제법 많은 보물이 담겨 있었다. 다른 구슬과 수없이 부딪히느라 흠집이 많이 생긴 구슬들과 백전노장이 되어 너덜너덜해진 딱지들은 땅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노병은 죽지 않는다.’고 외치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내 실력을 입증함으로써 체면을 세워준 낡고 멍든 그것들에게 나는 많은 애정을 쏟았다.
이사는 했지만 전학 절차가 늦어져 며칠 동안 큰집에서 먹고 자고 하던 때, 나는 몇 번을 망설였다. 분신 같은 보물을 두고 가자니 너무나 아까웠고, 어찌 보면 별것 아닌 걸 챙겨 가자니 촌놈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대밭 속 나의 보물을 둔 채 ‘도시촌놈’이 되었다. 진주에서는 10원짜리 동전으로 짤짤이를 하는 친구도 더러 있긴 했지만 또래 아이들 대부분은 거의 구슬치기로 해를 보냈다. 그래서 고향 갈 일이 있으면 묻어둔 구슬들을 반드시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어릴 적 우리 집 뒤 대밭 속에 나의 보물이 고이 잠들어 있다고 믿고 있다. 가죽나무와 자두나무 사이를 지나 대밭 가장자리쯤 큰 돌 밑에 고이 잠들어 있을 나의 보물들. 종이로 만든 딱지야 벌써 썩어 거름이 된 지 오래겠지만, 유리로 만든 구슬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삶이 힘들 때면, 내 유년의 추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구슬을 찾으러 가야지 다짐을 하곤 한다. 30년 동안 다짐만. 경남일보 201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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