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축구공

by 이우기, yiwoogi 2012. 6. 12.

마지막 어린이날 선물 축구공을 잃어버린 아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목소리도 떨렸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은 올해 어린이날이 어린이로서는 마지막 선물을 받을 기회인 줄 알고 진작부터 축구화 타령을 했다. 아들은 제가 먼저 인터넷을 뒤져 마음에 딱 드는 축구화를 골라놓고 5월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린이날에 맞춰 도착하도록 축구화를 주문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옆에 붙어 서서 반드시 축구공도 하나 사줘야 한다고 떼를 쓰는 게 아닌가. 작전에 말려들었다 싶었지만 아들 이기는 부모가 있을까. 나는 축구화를 만든 회사에서 파는, 빛깔이 비슷한 축구공도 더불어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합하여 12만 몇 천 원이었던가. 그런데 515일 스승의 날, 그러니까 선물을 받은 지 열흘 만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정색을 하며 드릴 말씀이 있다.”는 아들을 보면서 아연 긴장했다. “아는 형들이 축구공을 빌려가서 잃어버렸다고 해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스승의 날이라고 학교를 가지 않은 중학교 1학년 선배들이 초등학교에 놀러 와서 공을 빌려 갖고 놀고서는 잃어버렸다면서 그냥 가버린 것이란다. , 기가 막혀서. 운동장에서 갖고 놀던 축구공을 잃어버릴 것은 무엇이며 그렇다고 그냥 가버리다니! 화가 났다. 그게 어떤 공인데, 아들이 얼마나 애지중지하던 공인데. 다행히 한 명의 연락처를 안다고 한다. 나는 바로 전화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또 했다. 또 받지 않았다. 문자를 남겼다. 저녁 7시쯤이었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하든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닌가?”라고 점잖게 물었다. “알겠습니다.”며 풀죽은 듯 대답하던 녀석이 며칠 동안 답이 없어 휴대폰 문자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학교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겁을 좀 줘야 해결될 듯싶었던 것이다. 아들에게는 어쨌든 자기 물건을 간수하지 못한 책임도 있으니 똑같은 공을 물어내라 할 수 없다.”고 일렀다. 받아들이는 눈치는 아니었다. 억울하단 표정만 가득했다.

그렇게 시작된 중학교 1학년 친구와의 대화는 결국 62일 나의 통장으로 공 값의 80%에 해당하는 돈이 입금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사이 이 친구는 자기 친구들의 대변인이 되어 나와 통화해야 했고, 부모님 몰래 또는 부모님께 말씀드리면서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나 몰라라 하거나, 해결해 보자고 말만 하는 정도였으니. 나는 이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2만 원 하는 공 하나가 뭐라고, 그걸 빌미로 얼굴도 모르는 열네 살짜리 친구들에게 책임감 교육을 한답시고 나선 게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새 공을 아들에게 사주는 것도 결코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서 나는 그에게 책을 한 권 보내기로 했다. 중학교 1학년이 읽음직한 책을 찾느라 인터넷 서점을 뒤지고 뒤져 골랐다. 사실 나는, 돈을 부쳐오던 그날 낮에 만나자고 했고, 몇 명이 나오든 하다못해 라면이라도 한 그릇 사주려고 했었는데 그게 잘 안 되었던 것이다. 내가 보낸 책을 마음에 들어 하며 재미있게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번 일이 우리 아들에게 책임감을 깨쳐 주는 일화가 되었듯이, 얼굴 모르는 그 중학생에게도 작은 추억이 되었으면 싶다. 2012. 6. 4.

'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학생이 된 자랑스러운 다을에게  (0) 2013.03.07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로 되었으니  (0) 2013.01.29
보물  (0) 2012.04.30
눈물  (0) 2012.04.19
영어  (0) 2012.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