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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풍경

by 이우기, yiwoogi 2025. 4. 10.
<풍경>
병원 가느라 1시간 조퇴했다. 운도 좋지. 10분도 기다리지 않았다. 약국도 들렀다. 의사의 진료말씀과 약사의 복약지도가 달콤했다. 자동차가 쑥쑥했다.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세차했다. 운도 좋지. 내 앞에 한 대도 없었다. 흙먼지와 새똥이 씻겨 나갔다. 동전 500원으로 차 안도 좀 치웠다. 차 안에서는 90년대 노래를 들었다.
집에 차 대놓고 옷 갈아 입고 배낭 메고 숙호산으로 갔다. 대 작대기 하나 들고 할랑할랑 걸었다.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나불천 물소리도 듣고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었다. 숙호산 여기저기 매화 진 자리에 벚꽃과 목련이 봄을 희롱한다. 멧돼지 흔적도 없다. 혼자서 개폼 잡고 사진도 찍어본다.
대충 씻고 밥을 먹는다. 냉장고 안 이런 반찬 저런 반찬을 꺼낸다. 의사와 약사는 술 금지라고 했지만, 홍초 탄 소주 반 병은 용서되리라 스스로 믿는다. 먹다 보니 다 먹었다. 배 부르다. 밥 먹는 동안 라디오는 켜놓았지만, 뉴스라고 할 만한 내용은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설거지하면서 내일 아침에 먹을 고구마 두 개를 찐다. 라디오에선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출연하여 잘했니 못했니 따따부따 떠들어도 이전처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사필귀정', 이 한마디면 충분하니까. 그러고 나니까 문득, 책상 위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 놓고는 읽을 겨를이 없었다.
설거지 마치고 나면 뉴스만 보다가 잠든 게 너덧 달 됐다. 혼자 욕하다가 짜증 내다가 응원하다가 또 욕하다가 스트레스 받다가 잠든 날 꿈자리는 무척 사나웠다. 새벽에 잠 깨면 혹시 새소식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한숨도 쉬었고 복장을 두드리기도 했다. 혼자 소줏잔도 제법 비웠다. 일상, 소소한 날의 행복은 무너졌었다. 뒷골이 아프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런 나날이 이어졌었다. 이젠 아니다.
책이 눈에 들어와서, 그저 편안하게 앉아 돋보기 안경 끼고 몇 장 넘겨본다. 구구절절 금과옥조 같은 말들이 이어진다. 인생 공부가 된다. 시비에스 라디오 '행복한 동행'을 켜놓고 전우용 교수 책을 읽는, 이런 소소한 행복이 참 좋다. 이런 풍경이 날마다 날마다, 집집마다, 그 누구에게나 오롯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이런 아름답고 행복한 풍경은 절대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다시 깨달았다.
 
2025. 4. 7.(월)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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