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간이 배 밖에 나왔었나 보다. 친구 승배와 진주에 놀러 왔다. 어쩌자고 그런 작정을 한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마이크로버스 타고 40~50분가량 걸려 진주에 내렸다. 나는 진주가 거의 처음이었지만 이 친구는 몇 번 왔다 갔다 한 모양이다.
장대동 마이크로버스주차장 근처에서 짜장면을 사 먹고 진주성으로 향했다. 진주교에 놀라고 진주성에 놀라고 그 옆 제일극장에 놀라느라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연암도서관을 구경하고 나오다가 제일극장 옆 계단 모퉁이에 있던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승배는 무엇을 샀던지 모르겠다. 나는 자그마한 스탠드를 샀다.
4학년이던 1977년 전기가 들어오긴 했지만, 안간 숲골마을은 갈데없는 시골이었다. 저녁밥 먹고 10시도 되지 않아 전기를 꺼야 했다. ‘전기세’ 때문이었다. 읽던 책을 그대로 덮기에 아쉬움이 컸던 나는 스탠드가 있으면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기특하긴.
해거름 녘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낮 동안의 무용담을 지껄였던가 보다. “시끄럽다, 불 끄고 자라”는 아버지 호통을 뒤로한 채 작은방으로 달려간 나는, 형제들에게 스탠드라는 물건을 자랑했다. 빨간색과 노란색이 적절하게 섞여 있고 자그마한 전구 위에 덮어 씌우는 고깔모자도 깜찍했다.
신문물에 눈을 동그랗게 뜬 형이 “한번 켜 봐라”라고 했다.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았다. 스위치를 눌렀다. 0.01초 정도 환한 빛이 켜지는가 싶더니 “픽!” 하는 소리와 함께 꺼져 버렸다. 전구 필라멘트 끊긴 게 보였다.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던 큰형은 “그거는 100 볼트인갑다”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었을까.
난생처음 진주성엘 간 기념으로 산 스탠드는 그렇게 찰나의 빛을 선사하고 명멸해 갔다. 아쉽고 아깝고 화나고 짜증 나던 기억이 선명하다. 중학교 기술, 공업 시간에 100 볼트와 220 볼트의 차이를 알게 되었을 땐, 진주성에 대한 기억도 스탠드에 대한 미련도 이미 많이 허물어져 버린 뒤였다.
계단 옆 제일극장은 고등학교 때 많이 갔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끝나면 전교생이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영화 제목이나 내용은 거의 기억에 없다. 냄새 고약한 화장실에 줄지어 서서 오줌 누던 것이라든지, 그 와중에 담배 피우다 걸려 선생님께 귀를 잡혀 끌려 나오는 친구들이 기억날 뿐이다.
서장대 쪽으로 빙 돌아가면 중앙극장도 있었다. 이 극장에서는 철 지난 영화 두 편을 보여주었다. ‘동시 상영’이란 말을 처음 보고서는, 한 화면에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보이는 줄 알았다. 제일극장에서 단체 관람하던 날 생활지도부 선생님들은 어김없이 중앙극장 앞을 지키고 있었다. 중앙극장은 학생들이 보아서는 안 되는 영화를 주로 보여 주었었다. 그래서 제일극장보다 중앙극장을 더 오랫동안 추억하는 친구들도 많으리라. 나는 대학생 때 한두 번 가 보았다.
진주성 정화사업을 한다며 진주성 안에 있던 민가를 쫓아내고 제일극장, 중앙극장 따위 추억 어린 건물들도 허물었다. 연암도서관도 그즈음 지금의 선학산 아래로 둥지를 옮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고 잘한 일이지만, 그 시절을 향수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지는 것은 꽤 섭섭한 일이긴 했다.
문학회를 한답시고 밤늦도록 술 퍼 마시고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 부르던 때가 있었다. 인사동 골동품 가게 귀퉁이에 ‘띵발이집’이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덕분에 우리 아지트가 되었다. 어쩐 일인지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입가심하던 날이면 꼭 진주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던 것인데, 그때만 해도 공북문이 없었던지라 무상으로 드나들 수 있었다. 동쪽 하늘이 희부윰하게 밝아올 즈음 새벽 운동 나오는 동네 아지메들에게 정답게 인사 나누며 귀가하던 시절도 있다.
3월 초 봄 마중 삼아 찾아간 진주성에는 따뜻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섣부른 개나리꽃 몇 잎이 피었다가 동사한 흔적도 보이고 생강나무인지 산수유인지 모르겠는 노란 꽃들도 피어나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들은 까르르 웃음소리를 피워 올리고 해바라기 하고 앉았는 노인네들은 긴 하품으로 남강 바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촉석루, 의기사, 의암을 맴도는 관광객들은 스마트폰으로 추억을 담기에 바쁘고, 연인들은 연인이라서, 부부는 부부라서 서로 기억하고 남겨야 할 사진 찍기 놀이로 여념 없었다.
형평운동기념탑이 옮아가고 장어집들이 사라지고 여관들이 무너져간 빈터엔 문화재 발굴이 한창이다. 한창이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게 멈춰 서 있는 듯하다. 역사진주시민모임이 진주성 외성터 활용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기자회견을 한 것이 지난해 12월 20일인데 그 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는, 언론보도에는, 없다. 검은 천으로 덮여 있는 흙과 돌무더기 사이사이에 400~500년 전의 추억과 기억이 엎드려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3월 7일 <단디뉴스> 보도에 따르면 “진주시는 ‘진주대첩 기념광장 문화재 시굴조사 및 정밀발굴조사 용역’을 하기로 하고 7일 용역업체 입찰 절차에 들어갔다.”고 한다. 2017년 11월 진주성 광장 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건물(외성) 기단석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됐고, 문화재청은 전문가검토회의를 거쳐 정밀발굴조사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진주성 동장대 앞에 펼쳐진 마당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 광장을 진주성 또는 진주성 전투와 연관된 곳으로 만들어 나갈지(진주대첩광장), 아니면 그것뿐만 아니라 형평운동, 진주농민항쟁과 같은 다른 진주의 역사적 사실도 기억하도록 조성해 나갈지(진주역사광장)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쪽도 있을 것이다.
한 논객은 “누가 뭐라 해도 진주의 랜드마크는 촉석루와 진주성, 그리고 성을 감싸고 휘도는 남강이다. 구도심권의 회생은 새로 조성되는 진주성 앞 광장과 남강의 스토리텔링, 문화적 팽창에 있다 할 것이다. 파리의 센 강이 프랑스의 자존심이듯 남강은 진주의 자존심이다.”(변옥윤, 경남일보, 2017년 12월 12일자)라고 썼다.
현 진주시장을 비롯해 진주시장에 출마하려는 후보들마다 진주성, 남강, 촉석루를 연계한 각종 개발 계획을 내세운다. 이러저러한 건물을 짓겠다는 사람도 있고 망경동에서 촉석루까지 다리를 놓겠다는 사람도 있다. 새로 조성할 광장과 중앙 지하상가를 연계하여 관광벨트로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둘렛길을 조성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진주성은 의연히 그대로 있고자 하나 정치인들과 행정관료들, 학자, 시민단체들이 가만히 두질 않는다. 파헤치고 무너뜨리고 새로 쌓는 일이 일상이 된 후손들의 노략질이 거칠 줄 모른다. 그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한번 결정하고 나면 몇백 년을 이어가야 할지 모르니 좀더 천천히 결정해도 좋으련만.
모두들 자기가 책임을 맡고 있을 때 ‘한건’ 해버리려고 안달 난 모양새다. 어차피 새 시장 들어오고 새 국회의원 올라서고 새 도지사 들어앉고 새 대통령 당선되면 요래조래 이리저리 조리돌림 당할 운명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이 일을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까닭은 없겠지만, 도지사나 시장은 나름 큰 관심사일 터이므로 이번 6월 선거에서 새 사람이 들어오면 다시 처음부터 의논해 보는 것도 좋겠다.
임진왜란 훨씬 이전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던 진주성은 지금은 저 모양 저 구실을 하고 있지만 우리 죽고 우리 아들 죽고 우리 손자 죽은 몇백 년 뒤엔 어떤 모양 어떤 구실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아득한 옛날부터 까마득한 훗날을 죽 이어 놓고 보면 지금 우리가 아웅다웅 다투고 있는 이 시절은, 열두 살 때 샀던 그 스탠드의 찰나의 불빛처럼 정말 한순간일 뿐인데 말이다.
진주대첩광장도 좋고 진주역사광장도 좋다. 다만 거기서 아이들이 엄마 손을 놓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으면 된다. 연인은 연인이라서 부부는 부부라서 조용히 거닐며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을 수 있으면 된다. 노인들은 노인이라서 하염없이 앉아 해바라기도 하고 장기도 두다가 간혹 정치 이야기들로 갑론을박할 수 있으면 좋다. 문학한답시고 객기 부리는 청춘들 밤이슬 맞으며 시 한 수 읊을 수 있는 공간이어도 좋다. 외지에서 오는 관광객들은 목적이 관광이고 거기엔 공부도 포함될 것이므로, 진주에 대하여 진주의 역사에 대하여 무엇이든 한두 가지라도 제대로 배워 갈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이런 것 토론하고 논쟁할 때 ‘역사성’, ‘정체성’, ‘발전 가능성’, ‘지속 가능성’ 따위 ‘무슨무슨 성’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주성엔 ‘진주성’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
2018. 3. 11.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벚꽃은 져도 사쿠라의 계절이 남았다 (0) | 2018.04.03 |
---|---|
돼지국밥 이야기 (0) | 2018.03.22 |
가까이 있어서 더 큰 것의 소중함 (0) | 2018.02.28 |
가야 할 까닭이 있는 길은 힘들지 않다 (0) | 2018.02.19 |
격려하는 마음, 응원하는 한 마디 (0) | 2018.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