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능력검정시험은 유치원생 때부터 치른다. 첫 등급은 8급이다. 우리 아들도 어린이집 다니던 여섯 살 무렵 일, 이, 삼 같은 숫자에서부터 월, 화, 수, 목 같은 요일을 한자로 배워서 시험을 치렀다. 8급에 합격했다고 기뻐했다. 얼마 뒤 조금 더 어려운, 가령 밝을 명 같은 글자들을 외워서 7급에도 합격했다. 시험 문제지를 곁눈으로 넘겨다보고는 좀 웃었다.
오래 전 일이다. 어림짐작으로 10년은 더 된 듯하다. 한 대학 강의실에서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시험장에는 유치원생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초로의 중년들도 찾아온다. 초등학생 쯤으로 보이는 어린이가 3급, 2급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고 나이 든 사람들이 뜻밖에 7급, 6급 시험지를 붙들고 있기도 한다.
한 중년 아주머니가 6급 정도 되는 문제지를 들고 씨름을 하고 있었던가 보다. 시험 감독을 하는 사람이 대뜸 “아니, 아주머니, 주변을 둘러보세요. 한자 급수는 다들 어릴 때 따는 겁니다. 그동안 뭐 하셨어요?”라고 말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황당해진 아주머니는 속으로 ‘뭐 이런 개자식이 있어?’ 했겠으나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이라 그만 얼굴이 벌게지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니 아닌 게 아니라 자기 또래의 수험생은 아무도 없다.
그 감독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아들뻘 되는 애들하고 같이 시험 치르는데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그제서야 아주머니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항의하는 말이 몇 마디 오고갔지만 주변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아들 또래의 눈들이 부끄러워 그만 고사장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하지만 치솟는 분노는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러저러해서 그 감독이 어디 소속인지 밝혀 내고서는 그가 속한 기관에게 전화를 걸어 강하게 항의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시험 감독을 한 그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지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말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이해하고 양보해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야 했고, 꼭 한마디 하고 싶었다면, “아이고, 아주머니 배움에는 나이가 없는 겁니다. 정말 존경합니다.”라는 말로 격려하고 응원해 주어야 했다. 주변의 어린이들에게도 “이렇게 평생 동안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했다. 그 시험 감독은 어느 대학의 교수라고 나중에 들었다.
새해 들어 치과를 부지런히 다닌다. 부지런하다고 할 것도 없다. 의사 선생님이 언제 오라고 하면 가야 한다. 이가 부실한 건 서른 몇 살 때부터 알았다. 때맞춰 스케일링을 하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관리했더라면 오늘날처럼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흔 몇 살 때부터는 더 심해졌다. 급기야 쉰 살이 되기 전에 앞니에 보철을 했다. 오른쪽 왼쪽 아래 위 어금니를 뽑았다.
원인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총체적으로 관리 부실이 빚은 참극이다. 담배는 안 피지만 술도 이에 안 좋다. 양치질도 꼼꼼하게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이상 징조가 있을 때 치과로 달려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무 심하게 아려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치과에 가면, 그 아픈 이를 뽑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몇 해를 견뎌 왔다. ‘치과 가는 게 너무 무섭다’는 말은 변명도 핑계도 될 수 없었다.
도저히 물러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2017년 10월경이다. 추석 연휴 때 잇몸이 심하게 부어올랐고 이가 많이 흔들렸다. 치과에 갔더니 무려 예닐곱 개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 인공뼈를 넣어야 임플란트를 할 수 있겠다고 설명했다. 아득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1년은 넘게 걸릴 듯했다. 비용도 만만찮았다. 치아보험을 들어놓았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아내에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이가 부실하다는 걸 잘 아는 아내는 틈만 나면 제발 치과에 좀 가라고 했다. 알았다고만 말하고는 버티고 견디고 참았다. 조금 엄살을 부리자면, 사는 게 바쁘기도 했다. 대강의 경과를 들은 아내는 “지금부터라도 치과를 다니세요. 돈 걱정은 너무 하지 말고요.”라고 말했다. “아이고, 이 인간아!”라고 욕을 퍼부어도 아무런 대꾸를 못할 듯한데….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역시 아내는 내 편이었다. 미안함이 줄어든 만큼 용기가 커졌다.
그러나 다시 몇 달을 보냈다. 다른 치과 한두 군데 더 가보자 하는 요량이었으나 그것을 차일피일 미룬 것이다. 그 사이 아프던 이가 좀 가라앉은 탓이다. 결국 해를 넘겨 2018년 1월 2일 다른 치과에 갔다. 올해는 기필코 어떡하든 입 안을 단속해야겠다고 결심에 결심을 거듭한 것이다. 의사는, 나 같은 볼품없는 환자를 앉혀 놓고 1시간 넘게 상담해 주었다. 중간에 의사가 자리를 비우면 간호사가 다가와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현재 상황, 치료를 하게 되면 어떤 과정을 거칠지, 비용은 얼마나 들지 천천히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모형을 들고 와서 설명했고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주었다. 다른 사람 치료 과정도 보여주었다. 그런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고 심장이 두근 반 세근 반 뛰었다. 지나온 십여 년 세월이 후회와 반성과 자책의 폭포가 되어 사정없이 나를 때렸다. 따귀를 때리고 가슴을 쥐어박고 엉덩이를 걷어찼다. 나도 모르게 계속 ‘후유~!’ 한숨을 토해냈다.
“나처럼 이렇게 망가진 뒤에 오는 환자도 더러 있습니까? 너무 늦게 온 거죠? 정말 후회됩니다.” 이런 말을 뇌까렸다. 의사나 간호사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 자책하며 스스로에게 던지는 반성과 경고였다. 의사도 말했고 의사가 자리를 비운 뒤 간호사도 말했다. “선생님은 남은 인생 중에서 가장 일찍 오신 겁니다!” 이 말 한 마디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치료 시기를 놓쳐 망가질 대로 망가져 찾아온 환자에게 “지금까지 뭐 했느냐?” “저길 봐라, 초등학생부터 치아 관리하러 오는 학생들 안 보이느냐?” “지금부터 치료하더라도 원래대로는 안 되는 것이니 각오하라!”고 말한대도 아무 대꾸도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임플란트를 할 수 있을지, 하고 나면 원래 이와 비교하여 기능을 얼마나 회복할 수 있을지 따위를 설명하는데 나는 “그냥 틀니를 하여 살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임플란트를 하는 데 드는 기간과 비용이 무서웠던 것이다. 무엇보다 치과 진료실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을 앞으로 얼마나 더 들어야 하는지, 내 잇몸에서 솟아나는 피를 얼마나 더 삼켜야 하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뒤로 누워 코가 막혀 숨을 못 쉬게 되는 답답하고 갑갑한 상황을 얼마나 더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포가 더 컸을 것이다. 의사는 말했다. “선생님은 남아 있는 치아가 아직 많아요. 선생님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은 분들도 임플란트를 해서 원래 기능을 상당히 회복하곤 한답니다. 용기를 내세요.”라고 말했다.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심한 상태에서 치과를 찾는 사람도 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잘하여 건강을 회복하기도 하는구나.’ ‘많이 늦었지만, 그래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치료하면 훨씬 나아질 수 있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적인 생각은, 치과에서 상담하던 1시간 내내 내 머리를 쥐어짜고 있던 후회와 반성의 찌꺼기를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말할 수 없는 위안과 용기를 안겨 주었다. ‘지금까지’ 치과를 회피하면서 시간을 끌어온 나를 책망하기보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삶의 질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설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격려요 응원이었다. ‘세상에 환자를 이렇게 감동시키는 의사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1월 15일 한꺼번에 아래 위 어금니 여섯 개를 뽑고, 임플란트를 할 동안 임시로 사용할 틀니를 맞추느라 벌써 예닐곱 번째 치과를 다녀왔다. 어금니가 없으니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여문 음식은 씹지를 못해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제, 완전한 내 이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고 힘들지만 틀니를 갖추었다. 앞으로는 이 뽑은 자리에 뼈가 얼마나 자랄지, 잇몸은 어떤 모양으로 변형될지를 살펴본 뒤에 본격적인 임플란트 수술을 할 것이다.
치과 가는 길은 여전히 무섭지만, 이제는 망설이거나 주춤주춤하거나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아내와 의사와 간호사들의 격려와 응원을 등에 업은 나는, 치과에 간다. 내 이가 ‘튼튼’해질 때까지, 아니 의사 선생님이 그만 와도 좋다고 할 때까지.^^
그때 한자능력검정시험 감독으로부터 면박 당하여 시험장을 박차고 나간 아주머니가, 만약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6급, 5급, 4급, 3급에 도전하여 한자 박사가 되어 있지나 않을까. 아니, 그건 모르겠고, 스스로 격려와 응원의 전도사가 되어 우리 세상에 핀잔과 면박과 능멸과 무시와 멸시와 모함과 질투와 시기 같은 낱말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지는 않을까, 싶다.
2018.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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