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숙호산>

올 들어 네 번째 숙호산이다. 안 보이던 매화가 멀리 보이고 무심코 지나치던 목련 가지에 예쁜 봉오리가 맺힌 걸 본다. 바람은 생각보다 찬데 좀 걷다 보니 몸이 더워져 바람 온도를 잊은 것인지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바람이 옅어져 자연스레 인지하지 못하게 된 것인지 점점 견딜만 해지는 게 신기했다. 신기할 것도 없다.
해마다 이맘때면 한 주에 두어 번은 걷던 숙호산인데도 요 몇 해 사이엔 이상하리만치 발걸음을 놓을 수 없었는데, 그 까닭을 생각해 보니 정신이 나갔거나 혼이 빠졌거나 아니면 그만큼 나태해졌다는 방증일 것이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 또한 고민해 보니 어버이 붙여준 대로 치면 예순이나 되어버린 나이를 탓하는 게 가장 편하고 설득력 있는 것이 되겠고, 또 다른 까닭을 찾아보니 그럴 만하게 맡은 일이 복잡해지고 많아지고 판단이 어려워졌다는 뜻이겠다.
이제 겨우 네 번째라면 올해 숙호산과 사귀기는 애저녁에 걸러먹은 일인가 싶다. 도리 없다. 산새 노래, 개울물, 솔숲 바람, 매화 향기, 멧돼지 흔적 이런 것과 이별하고 자동차 엔진소리, 소주잔 쨍그렁 하는 소리, 컴퓨터 타자 소리, 사무실 문 비밀번호 해제되는 소리, 전화에 대고 굽실거리는 모습 들과 친해져야 할 것 아닌가 싶다. 이건 새롭거나 낯선 게 아니라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까.
마음 개운하고 몸 가벼워지려고 오른 숙호산 속에서 잠시, 아니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다가 조금은 쓸쓸히 내려왔다. 내려오니 사위는 온통 어둑어둑하다. 꼭 내 마음처럼.
2026. 3. 11.(수)
이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