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덕산사
내원사(內院寺)라고 불리던 절이 덕산사(德山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라 무열왕 4년(657년) 원효대사가 지리산 동남쪽 30리에 형성된 성지(聖地)에 덕산사를 세웠단다. 훗날 동방의 대보살로 불린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가 덕산사에 상주하여 많은 수행자가 모여들었고 그렇게 천여 년을 면면히 이어오다가 조선 광해군 1년(1609년)에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절터로 방치되었다가 1959년 원경스님이 절을 다시 세워 내원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다가 불과 4개월 전인 2021년 3월 덕산사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오래된 절과 관련한 이런 글을 읽으면 두 가지를 생각한다. 역사를 고증해 내는 힘의 위대함이 그 하나요, 의상대사와 원효대사 등 삼국시대 유명한 분들은 대개 건축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그 둘이다. 절을 찾아다니다 보면 절을 세운 스님은 몇몇 분이다. 그들은 전국을 주유하며 명승지에 절을 지으신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주말마다 달려가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정신의 수양을 얻는 것이다.
아무튼 그동안 문헌 기록 말고는 기존의 내원사가 덕산사 자리에 세워진 것을 실증하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해 내원사는 본명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20년 10월 대웅전의 위치고증을 위한 시굴조사에서 덕산사라는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발굴돼 비로소 내원사가 덕산사의 터에 지어진 것을 확인했다. 산청군과 내원사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명칭 되찾기를 진행했으며, 2021년 3월 중순 대한불교 조계종은 내원사의 사찰명을 덕산사로 변경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후 산청군은 3월 26일자로 전통사찰 변경등록을 완료했다.(경남일보 기사 참고)
이 절에는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33-1호)과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보물 1113호)이 있다.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있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국보 제233-2호)는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한다.(절 안내문 참고)
내원사로 불리던 아주 오래전에 몇 번 갔다. 절 규모가 작아서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늘상 근처에 있는 대원사(大源寺)와 견주곤 했다. 내원사 맞은편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민가가 더러 있고 그중에 민박과 식당을 하던 집이 있었다. 거기 단체로 놀러가서 실컷 떠들며 논 기억이 있다.
7월 18일 일요일 오전 10시쯤 옆지기와 출발했다. 얼마 전에 절 이름이 덕산사로 바뀌었다는 것을 절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았다. 가는 길가 계곡에는 여름과 사이가 좋은 젊은 사람들과 아이들의 흥을 북돋우려는 부부들이 꽤 많았다. 당연히 차들이 빈틈없이 빽빽했다. 하늘은 파랑색과 흰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주었다.
덕산사 아래 계곡을 굽어보았다. 맑은 물이 굽이쳐 흘렀다. 바위가 맨들맨들했다. 깊은 곳과 얕은 곳이 뚜렷이 구분되어 보였다. 물이 너무 맑아 고기는 살지 못할 것 같았다. 띄엄띄엄 몇몇 사람이 계곡 바위에 앉아 놀고 있었다. 절은 아직 ‘공사중’인 듯했다. 대웅전 시굴조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내원사’라고 쓰인 안내 간판은 그대로였고 대웅전은 임시로 이전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능소화 등 여름 꽃들이 절 여기저기에 피어 나비를 부르느라 향기를 뿜고 있었다.
내 눈길은 대웅전 터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으로 향했다. 보물 제1113호인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이라고 쓰인 안내 간판이 보인다. 이제 이 보물 이름도 ‘산청 덕산사 삼층석탑’이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 싶다. 탑은 오랜 세월을 이겨낸 흔적이 역력했다. 주위 풍경과 잘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상과 기품이 흘러넘쳐 나오는 것 같았다. 무심하게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모아 세운 듯하면서도 구석구석 교묘하고 절묘하게 잘 짜 맞춘 듯한 인상이 참 마음에 든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안내 글을 잠시 읽어 보았다.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신라 무열왕 때인 657년 때 처음 세워졌으나, 1950년대에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961년에 내원사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맨 위의 지붕돌이 많이 부셔졌으며, 상륜부(翔輪部)는 남아 있지 않다. 3층으로 된 지붕돌은 평평한 느낌이지만 모서리를 올려 경쾌함을 더하려 하였다. 4개의 주름 지붕돌과 전체적으로 길쭉해진 모습은 통일신라의 늦은 시기인 것임을 짐작게 한다. 그러나 여러 장의 돌을 짜 맞춘 기단은 이른 시기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를 살릴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문장을 좀 더 다듬어야겠다.)
처음 길을 나설 때에는 이런 귀한 보물을 영접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삼국시대에서 출발하여 고려,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이겨낸 굳건한 돌탑을 바라보면서 잠시 숙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높은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이 그 긴 사연을 알 것인가, 선듯 불어가는 바람이 그 애달픔을 알 것인가. 다만 하느작하느작 날갯짓하는 나비만이 내원사 삼층석탑의 비원을 조금이라도 아는 듯하다.
우리는 차를 굴려 대원사로 향했다. 여름 무더위를 시원한 계곡바람과 함께 보내려는 인파가 제법 많았다. 차는 많이 막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절 앞까지 올라가는 좁은 길에서 여러 대의 차와 길비낌을 했는데도 어렵지는 않았다. 대원사는 공사 중이었다. 무슨 공사인지 알아보지 않았다. 다만 대원사 앞 식당에서 40분가량 기다려 산나물 비빔밥 한 그릇과 흑임자 들깨탕 한 그릇을 잘 나눠먹고, 그길로 돌아왔다. 식당 바로 옆 계곡 물소리는 속세의 일을 잠시 잊게 해 주었지만 머릿속과 가슴속에 찌들어 있는 온갖 번뇌와 상념조차 씻어주지는 못했다. 돌아오는 길은 가깝고 덥고 졸렸다. 7월 18일의 기억은 내원사 삼층 석탑 하나로 충분할 듯하다.
2021. 7. 18.(일)
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