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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갈등, 병 주고 약은 주지 않겠다는 미국

by 이우기, yiwoogi 2019. 8. 8.

[조호연 칼럼] 한·일 갈등, 병 주고 약은 주지 않겠다는 미국


동북아 정세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산물이다. 한·일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의 경제침략 사태도 한·일 갈등이라는 표면을 한 꺼풀 벗겨보면 미국의 족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번 사태는 당연히 한·일 양국이 풀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도 결자해지의 입장인 것은 분명하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한국 경제의 높은 일본 의존도 탓에 가능했다. 그 같은 구조가 형성되는 데는 미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950년대 미국은 한국에 매년 2억여달러의 원조자금을 제공했다. 원조자금으로 일본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일본을 공산권 견제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전략 아래 일본의 경제부흥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은 자립경제 정책을 추구했지만 미국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한국은 일본 상품의 소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이런 지위를 이용해 한국을 괴롭혔다. 이를테면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무연탄과 고령토, 해산물 등의 반입을 억제했다. 한국에 필수적인 비료는 유독 한국에만 비싸게 팔았고, 어업수송선은 한국에만 수출을 금지했다. 전쟁의 늪에 빠진 데다 자립경제 기반이 전무한 신생국가 한국을 길들여 일본 의존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 지금의 경제보복과 많이 닮았다. 한국 덕에 패전의 늪에서 빠져나와 국가재건을 할 수 있었음에도 이런 치졸한 행태를 보인 탓에 한국인들로부터 ‘대국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일본은 알아야 한다. 결국 한국은 일본 경제 예속을 피하지 못했고, 일본은 70년 넘게 한국의 유일한 무역적자국이 되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미국이 책임져야 할 첫 번째 사유다.


한일협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의 주선과 개입, 압력에 의해 시작되고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일 양자협정이라기보다 ‘한·미·일 3자협정’에 가깝다. 한국은 당초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받고 배상을 청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부정하는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결과적으로 일제 식민시기의 인권탄압과 착취는 미국의 ‘한·미·일 반공 안보체제 구축’ 전략에 묻혔다. 그런 점에서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억지로 ‘역사의 창고’에 구겨넣어졌던 진실이 분출한 것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불거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문제도 미국의 연출로 이뤄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 합의 없이 한·일 정상회담은 없다”고 선언하자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전방위적 한국 압박에 나섰다.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공개 선언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의 봉합이 중요했던 것이다. 중국 전승절에 참석해 미국으로부터 ‘중국 편향’ 의심을 사던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결국 ‘대일 강경발언’ 2년 만에 위안부 합의에 동의하게 된다. 박 전 대통령 자신이 애초 공언했던 “당사자가 수용하고 국민이 납득하는” 위안부 문제 해결 원칙과는 정면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이 합의에 피해 할머니들은 피눈물을 흘렸지만 오바마는 “정의로운 결과”라고 높이 평가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어떻게 한국인들을 역사의 피해자로 만드는지 잘 보여준다.


미국은 일본의 경제침략 사태를 중재하거나 조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미 고위 관리들은 “한국과 일본 간 문제”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태를 해결하려면 일본은 과거를 성찰하고, 한국은 그것을 전제로 대승적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한·일 갈등의 원인 제공자로서 미국이 방관하는 것도 중대한 직무유기다. 병 주고 약은 주지 않겠다는 태도 아닌가.


인내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한·일 갈등은 양쪽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한 전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임계치를 넘어서면 한·미 및 미·일 동맹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존립도 위협받을 수 있다. 이대로라면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곧 중대한 도전에 봉착할 것이다. 명분으로나 이해관계로나 미국의 방관은 오래가기 어렵다.


미국에 당부한다. 이번 사태에 개입하려거든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과거처럼 또다시 ‘한국 차별, 일본 우대’로 할 양이면 차라리 개입하지 말기 바란다.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에 한국 원조자금 특혜를 받으면서 경제대국으로 거듭났음에도 여전히 역사를 직시하지 않고 있다. 한국만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방식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다. 이번에야말로 미국이 진실의 편에 서기 바란다. 그것이 인권을 보장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공명정대한 길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한·미·일 3국 모두에 이익이 될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062051015&code=990100&s_code=ao247#csidx31c3d49ae51a2108c8515d44d6021d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