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 알았다. 몇 해 전 겨울이었다. 골프연습장 지나 건널목 건너 숙자네를 돌아서서 만난 고목은 죽은 듯했다. 껍데기는 썩어 벗겨져 너덜너덜거렸다. 중간 허리는 톱날에 잘렸다. 겨우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들은 기력을 잃었다. 배나무 같기도 하고 매화나무 같기도 했다. 어림짐작으로 30년은 더 된 듯했다. 그 나무는 죽었다고 보는 게 맞을 성싶었다.
봄이 왔다. 골프연습장 드나드는 승용차 흘겨보며 숙자네 맛국 냄새 음미하며 석갑산으로 올랐다. 석갑산 편백나무 숲은 겨울을 이겨낸 자랑으로 가득했다. 편백 숲 중간중간에 벚나무가 연분홍 꽃을 피워 존재를 알렸다. 길가에는 개나리, 매화, 목련, 살구 들이 봄을 마중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무도 깨어났다.
겨울을 나느라 고단해진 나무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뻗은 몸체는 비바람에 깎이고 눈보라에 시달려 목숨을 다한 듯했다. 땅에서 기어오르는 이름 모를 넝쿨에 몸을 내맡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맨살로 엄동설한을 어찌 이겨내었을까.
다행은 있었다. 왼쪽으로 뻗은 몸체는 비록 튼튼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가지도 제법 뻗었다. 기적에 가까웠다. 자연의 위대함이었다. 끈질긴 생명 앞에 경외감이 일었다. 탄성이 터졌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갔다. 올해도 위태위태해 보이는 건 변하지 않았으나 나뭇가지 끝에 잎을 틔워내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고목 혼자 죽음과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일까.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길가에서 나를 좀 보아 달라고 외치며 또다시 돌아온 봄을 환영하는 것이었을까. 가지 끝 잎사귀 한 장을 살려내기 위하여 썩어 문드러진 밑둥 위와 아래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었던 것일까.
동네 어귀엔 수백 년은 되었음 직한 정자나무가 있었다. 정자나무는 느티나무이기도 했고 포구나무이기도 했다. 정자나무는 집 근처나 길가에 있는 큰 나무를 가리킨다.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하여 그늘을 만드는데 그늘 밑에서 사람들이 모여 놀거나 쉰다. 주로 느티나무가 많고 포구나무도 제법 있다. 포구나무는 팽나무다.
수백 년 세월을 살아온 나무들은 알게 모르게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썩어간다. 어른 서넛이 안아도 될 만큼 굵은 밑둥은, 그러나 안에서부터 썩고 삭는다. 하여, 어른들은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그 빈 공간을 시멘트나 황토로 채워두곤 했다. 세상에! 그렇게 해서 나무가 살 수 있을까. 오뉴월 태풍이라도 불면 부러지지 않을까. 시멘트 독 때문에 더 빨리 죽지나 않을까.
하지만 정자나무 들은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 버티고 있다. 밑둥치의 거의 대부분을 시멘트에 의지하면서도 느티나무는 해마다 연둣빛 잎사귀를 피워냈다. 포구나무는 더 굵은 뿌리를 뻗어 나가면서 포구열매를 알뜰히도 맺어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무는 쉬 죽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횡사하는 일이 있다. 교통사고 같은 사고사가 아니라 몸에 퍼져 있던 어떤 병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이 더러 있다. 무슨 암 진단을 받은 게 한두 달 전이라고 들은 듯한데, 그 사람의 부고를 받는 일이 가끔 생긴다. 무서운 일이다. 건강한 세포에 기생하며 영양분을 갉아먹는 암세포를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보통 후회나 탄식과 함께 찾아온다.
간에 암세포가 붙었다면 간을 도려내고 시멘트를 채워놓을 수 있을까. 위에 큰 병이 생겼다면 위를 죄 들어내고 고무풍선으로 땜방해 놓을 수 있을까. 당뇨가 심해져서 발가락을 잘라야 한다면, 정말 그렇다면 다리 하나라도 뎅겅 잘라버리고 나무나 플라스틱 막대기를 꽂아 놓을 수 있을까. 머리 속에 기생충이 들어앉았다면 큰골이나 작은골을 싹둑 잘라내 버리고 호두나 표고버섯으로 내용물을 얼기설기 엮어 놓을 수 있을까.
그래 놓고도 아무일 없다는 듯,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나무들처럼, 우리네 인간도 먹고 자고 뛰고 놀고 웃을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그마한 기생충에 감염되어도 죽을 수 있고 이름도 모르고 생긴 꼬락서니도 모르는 바이러스 때문에 횡사하기도 한다. 병이 생긴 줄 번연히 알면서도 아무 대책을 세울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사람은 그렇게 죽어간다. 몸의 오른쪽이 썩어 문드러져도 왼쪽만 살아 있다면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살아가는 나무에 견주면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허약한가. 그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대책 없고 가엾은 존재인가.
한쪽은 썩어가고 한쪽은 새싹을 틔워내는 나무의 투쟁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 썩어가는 한쪽을 톱으로 베어 버리면 좋으련만 길을 오가는 누구도 그러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보았다 하더라도 ‘굳이 내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눈길을 받으며 나무는 홀로 서고자 하고 있고 홀로 꽃을 피우고자 하고 있다. 오월을 맞이하여서는 찬란한 신록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거추장스럽게 썩은 가지를 버리지 않은 채 보란 듯이 잘도 자란다.
우리 사회의 한 부분도 썩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한 회사나 한 회사의 한 부서나, 아니면 정계 또는 경제계의 한 부분이 썩었다고 할 수 있을까. 썩었다고 말하기에 좀 뭣하다면 ‘비정상이다’거나 ‘문제가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역사를 다 들추어낼 것도 없이 요사이 몇 해 동안 벌어지는 일을 보노라면 ‘정상이다’, ‘문제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썩은 부분은 도려내는 게 맞다. 고름은 아무리 오래 놔둬도 내 살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병을 부를 뿐이다.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면 기준을 잘 세워야 할 것이고 칼날도 날카롭게 잘 갈아야 할 것이다. 자칫 하다간, 흰 머리카락 뽑으려다 검은 머리카락도 뽑게 되듯이 건강한 살도 찢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썩은 살을 잘라내고 나면 몸은 건강해질까.
나무는 밑둥은 한 나무이지만 썩은 가지와 말짱한 가지가 공존할 수 있다. 자연의 법칙은 그러하다. 사람 몸은 어디 한 곳이 썩거나 망가지면 아예 잘라내야 한다. 사회 조직은 어떠할까. 자연과 같을까, 사람 몸과 같을까.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 하여 적으로 간주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것은 사람의 법칙에 따른 것일까 자연의 법칙을 그스르는 것일까.
석갑산은 신비로움에 가득차 있다. 가장 신비로운 건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다음 신비로운 건, 그러한 것들이 우리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뉘우치게 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무심코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닐 듯한 것이, 눈여겨보아 주는 순간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번 생각하면 간단한 이치가 보이고 두 번 생각하면 복잡한 우리 사회를 반영한 듯 보이고, 여러 번 생각하면 세상만사 이치와 자연의 섭리가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듯하다. 석갑산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게 다 그렇다.
2018.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