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50분 도동 홈플러스 앞에서 353번 버스를 탔다. 버스 안내 표지판에 진주여중, 공설운동장, 촉석초교라는 글자를 본 것이다. 어디로 돌아가든 버스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우리집에서 4-5분 거리인 진주여중 앞에 내려주겠구나 싶었다. 라디오를 듣거나 잠시 졸아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승객은 자리를 겨우 채울 정도였다. 퇴근 시간인 걸 생각하면 좀 뜻밖이었다. 덕분에 맞춤한 자리에 냉큼 앉을 수 있었다.
버스는 시청 앞을 지나 진양교를 건넌다. 경남과기대 앞 반성장터국밥이 떠올랐다. 중앙시장 안에 있는 송강식당을 가고 싶었으나 좀 늦었다. 버스를 타면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아무렇게나 할 수 있어서 무척 좋다. 결론으로, 공설운동장 뒤 자그마한 로터리 근처에 차가 선다면, 나는 병천순대돼지국밥 집에 가기로 했다. 강남, 칠암동을 지나 진주교를 건너면 이 차는 중앙광장에서 좌회전하여 롯데시네마, 이마트, 부산교통 본사를 거쳐 진주여중 앞으로 곧장 달려갈 것이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지점이다.
손님은 한두 명 내리고 아예 아무도 타지 않거나 한 명 타는 정도였다. 그러니 버스 속도는 빨랐다. 아무도 내리지 않고 아무도 타지 않은 채 휙휙 지나가는 정류소가 늘어났다. 이 시간 즈음에 이렇게 이용하는 승객이 적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무정차로 스쳐 지나가는 정류소가 몇 군데인지는 세지 않았다. 미리 그럴 줄 알았더라면 하나하나 세어봤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 정류소를 그냥 지나갔다. 7시 전후의 시간에.
버스는 중앙광장, 즉 서경방송 앞에서 좌회전하여 이마트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깜짝 놀랐다. 잠시 뒤면 뜨끈뜨끈한 국밥에 소주 한잔 하겠구나 싶던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주 엠비씨네에서 실록영화(다큐멘터리) <김광석>을 본 뒤라서 그를 추억하고 명복을 빌며 혼자 한잔하고 싶었는데, 이 차가 어디로 가는 거야! 버스는 진주고등학교 방향으로 곧장 달렸다. 황급히 버스 안에 있은 노선도를 다시 보았다. 아뿔싸! 이 버스가 가려는 노선은 참 황당하고 놀라웠다.
국민은행 앞을 지난 버스는 갤러리아 백화점을 왼쪽으로 힐끔 쳐다본 뒤, 롯데인벤스아파트 앞으로 돈다. 우회전이다. 다시 옥봉성당 옆을 지난 버스는 내 모교 봉래초등학교를 지나 진주향교 앞으로 내처 달린다. 노선대로라면 진주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나고, 장대시장, 중앙시장을 지나 다시 중앙광장을 지나간다. 그러니까 중앙광장을 꼭짓점으로 장대, 수정, 봉래, 옥봉동을 끼고 한 바퀴 빙 도는 것이다. 이렇게 돌아가는 삼각지 같은 버스 노선은 처음 본다. 세상에 참 웃기는 노선이다. 마을버스도 아니고….
7시에서 7시 30분 사이이면 버스를 이용할 승객이 적지 않을 시간이다. 퇴근을 하거나, 집에 차 갖다 놓고 다시 외출하거나 간에…. 하하하. 그건 순진한 내 생각이었다. 진주향교 앞에서 마지막 한 손님이 내렸다. 나만 남았다. 그때부터 이 버스가 말티고개 입구, 옥봉삼거리, 시외버스터미널, 장대시장, 중앙시장, 롯데시네마, 이마트, 부산교통 본사, 공설운동장을 지나는 20여 분 동안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마트 앞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차를 세웠다. 혼자 전세버스 이용하듯 하는 게 좀 미안했는데, 드디어 한 분이 타는구나 싶었는데, 웬걸, 그분은 노선만 물어보고 타지를 않는다.
차 안에서 혼자 사진 찍기 놀이도 하고, 음악도 들으면서 황제처럼 전세버스를 즐겼다. 참 생각하면 할수록 희귀하고도 희한하고도 웃긴 노선 버스도 다 있구나 생각했다. 새벽 시간도 아니고 늦은 밤도 아닌데, 14-15개 정류소를 내리는 사람도 없고 타는 사람도 없이 지나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만 그런가? 아무 생각없이 버스 타기 놀이를 즐기고 싶은 분에게 소개해 줄 만한 상황이다.
요즘 진주 시내버스 노선 개편, 버스 줄이기(감차) 등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나는 버스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밖에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없다. 그렇지만, 버스를 탈 때마다 이전보다 더 편리해졌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고 불편해지거나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노선을 개편하는 근본 까닭이나 노선을 그렇게 정하게 된 이유는 잘 모른다. 막연하게 시민이 얼마나 편리한가, 버스 회사들에 이익이 골고루 돌아가는가, 교통량을 적절하게 분산하는가, 승객이 집중되는 시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가 따위를 잘 분석했으리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늘 경험한 것으로 본다면, 아주 많이 이해하기 어렵다.
진주여중 앞에서 내렸다. 7시 45분이다. 거의 1시간을 탔다. 재미있었다. 지나가는 가게 간판들 불빛이 재미있고 앞질러 가거나 뒤쳐져 가는 여러 모양 차들도 재미있었다. 듣고 있는 노래도 괜찮았다. 승용차를 운전할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많이 보인다. 조금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진주시 저녁 풍경은 가을스럽다. 도시는 텅 빈 듯하고 바람은 휑하게 분다. 차에서 내리니, 바로 눈앞에 보이는 병천순대 간판이 그렇게 따뜻하고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8월 31일이로구나. 9월아 반갑다.
2017.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