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쯤 눈 뜨자 마자 어머니께 전화했다. 어버이날인 어제 해야 했는데 일부러 오늘 아침에 했다. 어버이날 기념 가족 모임은 토요일 저녁 큰형 집에서 소박하고 뻑적지근하게 했다. 이런저런 안줏거리 펼쳐 놓고, 특히 어머니 좋아하시는 회도 시켜놓고 온가족 모여 놀았다. 취하여서는 어머니 앞에서 재롱잔치 한다고 아들 며느리들 일어나서 손뼉치며 노래도 했다. 동영상을 보니 민망해서 고개를 못 들겠는데 그럴수록 어머니에겐 더 아기같이 보였을 것이다. 어버이날인 어제 굳이 전화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어머니는 카레를 해 먹을 것이라고 하셨다. 돼지나 소 같은 육고기를 못 드시니 닭을 넣을 것이라고 하셨다.
투표는 아직 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어른들은 새벽같이 투표장으로 나서는데 오늘은 좀 미적거리고 계셨다. 비 탓인가. 누굴 찍을 것이냐 여쭈었다. 물론 물어서도 안 되고 묻는다고 답할 이유도 없다. 모자 사이든, 부부 사이든. 나는 대학 다닐 때부터 아버지 어머니께 편안하게 물었고 무심코 대답하곤 했다. 내가 찍고자 하는 후보와 어버이가 지지하는 후보는 단 한 번도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끝내 ‘정치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다르지 않다. 10년 정도 빼고 거의 평생 ‘1번만’ 찍은 분이다.
노동절 아내와 함께 어머니 모시고 망경횟집 가는 길에 진주교 입구 어느 건물에 홍 아무개 후보 걸개그림이 걸려 있기에 누굴 찍을 것이냐 여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홍 아무개 찍을 것이라고 한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간첩이라고 한다. 누가 그러더냐고 여쭈니 그냥 그렇다고 하더란다. 한숨이 나왔다. 그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맛있는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었으므로 짧게 말했다. 그 사람들 간첩 아니다. 만약 간첩이었으면, 빨갱이였으면 이 아무개, 박 아무개라는 사람이 대통령이었을 때 그냥 뒀겠느냐 하고 말았다. 새겨듣는 것같지 않았다.
어머니의 정치적 교과서는 경로당이다. 경로당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고 받는 말은 사실이요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빨갱이고 그들이 집권하던 시기는 암흑이다. 이 아무개, 박 아무개가 대통령이 되자 살 만한 세상이 돌아왔다고 여겼다. 그 사이 수없이 많은 토론과 논쟁이 있었지만 한번도 주장을 꺾지 않았다. 당신의 아들 넷 가운데 셋이 월급쟁이고 한 명이 자영업자인데 아들들에게 가장 유리한 정책을 펴는 사람이 누구라고 자세하여 말씀드려도 곧이 듣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나를 빨갱이냐고 호통치기도 했다. 아득했다.
부모 세대의 정치 의식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면 경로당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끊임없이 수구 꼴통 의식을 배달해 주는 사람은 누구일까. 정말 주도면밀한 사람들이다. ‘불법은 성실하다’던 김어준 말이 생각난다. 경로당에 끊임없이 꼴통 논리를 배달하던 사람을 불법이라고 하는 건 아니다. 경로당에서 배운 건 사실이요 진리를 넘어 맹목이요, 종교와 같다. 전쟁을 겪은 세대, 다카키 마사오를 신과 동일시하는 세대에 지속적으로 극우 반공 수구 꼴통 논리를 공급해온 저들의 ‘성실함’은, 오히려 진보쪽에서도 한 수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듭된 설득에 어머니는 포기한 듯했다. 그렇다고 자식이 찍으라는 후보를 지지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4번이나 5번 찍어서 사표를 만들고 말겠다고 선언했다. 장인을 가리켜 “영감탱이”라고 하는 후보를 찍으면 안 된다고 한 말이 먹혀 들었는지, 젊을 적 여자를 강간하려고 모의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기 책에 적은 사람이라고 한 말이 먹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웃으며 4-5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니가 당신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굽힌 건 난생 처음이라 적이 놀랐다. 더 이상 달려들 수는 없었다. 그만 하면 됐다 싶었다. 41년생이니 일흔일곱 인생을 살며 고착화, 화석화한 의식에 아주 조금이라도 얼룩이 생겼다고 할까, 균열이 생겼다고 할까. 나는 드디어 효도라는 것을 조금 했다고 생각한다.
어버이날인 어제 아침 8시쯤 장인 어른께 전화드렸다. 찾아뵙지 못하고 전화로 인사드리게 된 것을 사죄드렸다. 4월 15-16일 처갓집 온 가족이 충북 영동에 모여 재미나게 놀고 왔지만 어쩐지 죄스러웠다. 건강이 어떠시냐 여쭈니 요즘 밥맛이 없다고 하신다. 어버이날인데 쉬시느냐 여쭈니 벌써 ‘발안’에서 일하고 있다 하신다. 2013년에 칠순잔치를 했으니 정말 적지 않은 연세인데도 아직 정정하시다. 요즘 듣는 안부로는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던데, 그래도 일거리가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새벽같이 나가신다. 건강하시길 빌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창밖을 보고 나서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장모님께는, 내가 울까 봐 전화를 못하겠으니 대신 하라고 하였다. 노동 현장에서 몸으로 돈을 벌고 계신 아버님 모습이 하루 종일 눈앞에 어른거렸다. 영동에서 뵈었을 때 늦은 밤 큰아들과 큰사위를 불러 앉혀놓고 30분 이상 ‘훈화말씀’을 하실 만큼 정정하셨는데….
2007년, 그러니까 10년 전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아들은 어버이날 기념 편지를 만들어 왔다. 어린이집에서 선생님들이 이리저리 여러 번 손질해 준 흔적이 역력했지만, 아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편지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며칠 전부터 눈에 띄었다. 보들보들하고 야들야들하던 아들의 살결이 떠오른다. 볼살이 통통하고 눈빛이 초롱초롱하던 일곱 살 나이의 아들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웃음이 번져간다. 변성기 지나고 사춘기 지나고 콧수염이 제법 시커매진 고2 아들을 바라보는 눈은 과거보다는 미래로 나아간다. 정강이 장딴지가 뻣뻣하고 탱탱한 우리 아들은 그 존재만으로 보물이고 선물이다. 그런 아들이 12시 넘은 시간 학원에서 돌아와 무엇인가를 내민다. 아내 것과 내 것을 따로 샀던가 보다. 아침 밥상머리에선 “아차, 어버이날이네요. 선물 준비 못했어요.”라던 녀석인데…. 고맙다.
저런 어머니, 그런 장인 장모님, 이런 아들들이 모두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아, 물론 나같은 중늙은이들도 행복한 세상 말이다. 칠순잔치 지나고 나면 공공근로이든 막노동이든 굳이 일터로 나가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문제 없는 세상을 바란다. 아이들은 자기 취미와 적성, 그리고 꿈에 맞게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나중 직업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굳이 대학이라는 데를 가지 않아도 인간으로 존중받고 역시 먹고사는 데 아무런 문제 없는 세상을 바란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직장을 다니지만 10년쯤 있으면 퇴직할 터인데 그 뒤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서 먹고살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복지가 탄탄한 세상을 꿈꾼다. 선거를 앞두고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핏발 세우며 논쟁을 벌이지 않아도, 진보 후보가 되든 보수 후보가 되든 우리 삶을 크게 바꿔놓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넘치는 세상을 기다린다. 그런 세상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날 아침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
2017.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