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33 아버지의 강 억울했다. 아버지는 분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듯했지만 나는 나대로 정말 억울한 걸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뺨을 맞든지 하루 종일 꿇어앉아서라도 용서를 빌 텐데 그건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용서를 빌려면 확실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다짐해.. 2015. 1. 1. 김장 다섯 집 겨우내 먹고 여름엔 고등어묵은지찜 또는 묵은지갈비찜이라도 해 먹으려면 넉넉하게 마련해야 했다. 시어머니와 네 며느리가 모여 김장을 했다. 미리 배추를 집까지 옮기고 다듬고 자르고 절이는 일은 어머니, 아버지가 다 했다. 온가족이 모두 모이는 날은 양념을 치대는 날이.. 2014. 12. 14. 고구마 학교를 파하여 집에 가도 먹을 게 별로 없던 시절이다. 바로 앞집이 점방(가게)이긴 했지만 주머니엔 땡전 한 푼 없는 날이 더 많았다. 10원, 20원 하는 과자가 더러 있긴 했는데 그만한 용돈도 소풍 때나 명절 말고는 손에 쥘 수 없었다. 오후 서너 시, 햇살은 비스듬히 누워 감나무 가지 사.. 2014. 12. 12. 농민 나는 농민의 아들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진양군 미천면 안간리 숲골마을이다. 숲골은 나중에 ‘임곡’으로 바뀌었다. 한자숭배자들의 짓이다. 일제 강점기를 그리워하는 자들의 흉계다. 농민들의 바람대로 바뀐 이름이 아니다. 우리 집은 땅이 많지 않았다. 보리, 고구마, 감자, 옥수수 .. 2014. 11. 30. 아이 말, 어른 말 큰형은 어느 날 동생 셋을 모아 놓고 “우리 이제 옴마, 아부지께 존댓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내가 열 살쯤이었고 작은형은 열두 살, 큰형은 열네 살이었을 것이다. 동생은 일곱 살이었겠군. 너나없이 부모에게 반말하던 시절이다. 큰형은 중학생이 되더니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2014. 11. 1. 2000만 원 2011년 10월 말 서울 아산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고 경상대학교병원 경남지역암센터에서 아버지는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아산병원에서는 닷새 동안 입원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검사만 받았는데 퇴원할 때 몇 백만 원이 나왔다. 네 형제는, 처음엔 대중없이 병원비를 감당하다가 앞으로 아.. 2014. 10. 9.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