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칼에서 배우는 교훈
몇 해 전 텔레비전에서 ‘장미칼’ 광고를 보게 되었다. 칼 옆면에 장미 그림이 새겨져 있는 그 칼은 무엇이든 자르지 못하는 게 없었다. 김밥을 가지런히 예쁘게 자르는 것에서부터 냉동고기까지, 심지어 쇠붙이도 잘라냈다. 그런가 하면 얇은 종이도 부드럽게 잘랐다. 마법의 칼이었다. 광고를 하는 사람은 외국인이었는데, 생긴 게 믿음직스러웠다. ‘영국 정통’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이 진실로 들렸다. 마음이 혹했다. 칼이 잘 안 든다고 하던 아내에게 선물하여, 덕분에 부엌일을 즐기는 편인 나도 좀 써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했다.
며칠 뒤 예쁜 장미 그림이 그려진 칼이 배달돼 왔다. 큰칼과 칼날이 톱으로 된 칼, 가위, 칼집 이렇게 이것저것 잘 갖추어져 있었다. 색깔도 생각보다 예뻤다. 부엌에서 장미 향기가 나는 듯했다. 밥때도 아닌데 요리를 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김치나 양파나 대파를 자를 때 장미칼은 아더왕과 함께 말을 타던 기사들의 칼같이 날카로웠다. 톱날을 가진 칼은 오렌지를 깎을 때 제격이었다. 넓적하고 묵직한 가위도 멋있었다. 이걸로 무엇을 할까 냉장고를 뒤져보곤 했다. 대체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였다. 칼은 얼마 가지 않아 장미 그림이 벗겨져 버렸고 날 끝은 휘어져 버렸다. 그나마 좀 낫다 싶던 가위도 마찬가지였다. 속은 것이다. 그 정체를 드러낸 건 죽순을 자를 때였다. 죽순은 그다지 단단한 물건이 아니다. 보통 칼로써 쉽게 자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순을 자르다가 장미 그림이 벗겨져 버렸다. 정체가 탄로난 장미칼은 뒤이어 자신의 부족한 능력과 형편없는 실력을 깡그리 드러내고 말았다. 무쇠보다 단단한 것 같던 칼날은 낭창낭창 휘어지는 함석으로 보일 정도였다. 냉동고기를 자르면서 팔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이런 칼을 영국 정통의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자랑을 해댔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칼의 나약한 속살을 속속들이 들여다본 다음날 텔레비전 화면에 나왔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했다. 한참만에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저희들은 광고를 대행할 뿐이지 칼의 품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고 둘러댔다. 더 화가 났다. 그럼 물건 만드는 회사 연락처를 대라고 하니 모른다고 발뺌한다. 사기도 그런 저질 사기가 없었다. 텔레비전 홈쇼핑 광고를 보면서 보기 좋게 속은 것이다. 당시 홈쇼핑 회사마다 앞다투어 장미칼 광고를 하였다. 하나쯤 장만해 두면 앞으로 평생 칼 갈거나 새 칼 살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보기좋게 망신만 당한 꼴이다.
원래 홈쇼핑 보고 물건을 잘 사지 않는 편이다. 화면으로 보는 색깔과 실제 물건 색깔이 다를 수도 있다. 품질을 설명할 때는 실제 진품으로 보여준 뒤 소비자에게 보내줄 때는 조악하게 만든 가짜를 보낼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드러내놓고 사기를 칠 사람들이야 없겠지만 믿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던 내가 장미칼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칼을 만드는 회사에 달려가 항의하고 싶었으나 몇 만 원어치 술 마셨다 여기기로 하고 넘어갔다. 대신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 같은 누리소통망서비스(SNS) 여기저기 이런 사연을 올렸다. 모르긴 해도 장미칼을 사려던 몇 분이라도 내 글을 본 뒤 구입의사를 포기했을지 모른다.
장미칼 하나 사는 것이나 자동차 한 대 사는 것이나 집 한 채 사는 것이나 비슷한 일이다. 누군가 작정하고 속이려 들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신뢰하고 결정했다간 큰코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 일어나는 세상이다. 우리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을 선택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수사와 거침없는 말투, 인정스레 건네는 악수, 속내를 다 드러내보이는 듯한 환한 웃음을 보면 유권자들은 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무리 냉정하고 꼼꼼하게 후보자를 뜯어보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선거 기간에는 간까지 다 빼내어 줄 것처럼 하는 후보자가 있다. 자기 재산을 내어 무슨 사회봉사 재단을 만들겠다고 호언하는 후보자도 있다. 심지어 강도 없는데 다리를 놓겠다고 공약하는 후보자도 나온다. 강도 없는데 어디에다 다리를 놓을 것이냐 물으면, 그러면 강부터 파겠다고 태연자약하게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선거판은 으레 그렇다. 얇은 종이에서부터 딱딱하게 꽁꽁 언 돼지고기 덩어리뿐만 아니라 심지어 쇳소작까지 잘라내는 칼을 보면서, 감탄하다가 반하다가 끝내 전화기를 집어드는 텔레비전 앞 소비자들이나, 강 먼저 판 뒤 다리를 놓겠다고 하는 정치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하 유권자나 다를 바 없다.
칼을 쓰다가 장미 그림이 벗겨지고 칼날이 무뎌지는 것을 보고서야 “아차! 속았구나.” 할 땐 이미 늦다. 칼을 판 회사에 전화하여 항의한다고 하여도 부질없다. 운 좋으면 새 칼로 바꿔주기는 하겠지만 그 칼이나 그 칼이나 다를 바 없잖은가. 당선된 정치인이 굽실거리던 허리를 뒤로 젖힌 채 빵빵한 배를 내미는 것을 본 순간, 순진한 유권자는 “아차! 속았구나.” 하겠지만 이미 늦었다. 제도적으로는 주민소환제라는 것이 있지만, 그 속임수에 놀아나는 반대편 유권자도 없지는 않는 것이어서 그 또한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선거 기간에 장미 향기를 내뿜는 듯한 감언이설에 현혹당하여 몇 년 동안 지역의 살림살이를 깽판칠 사람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자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고 뛰어난 칼을 단돈 몇 만원 싼값에 팔겠다고 하는 데 속아서도 안 된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렇게 유권자를 배신하고 지역을 거덜내는 정치인을 4년 동안 겪어 놓고도 다시 선거철이 다가오면 배신의 아픔이랄까 잘못한 선택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랄까 아무튼 그런 정신적 각성을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장미칼 한 자루 잘못 산 것은, 친구들과 몇 만 원어치 술 마셨다고 여길 수도 있고 이웃돕기 성금 내었다고 여기면 그만이지만, 한 지역의 정치와 행정을 책임지는 사람을 잘못 선택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크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장미칼 광고 관련,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나무위키에서 옮겨옴).
“2013년 9월 25일 방영된 불만제로Z에 밝혀진 바로는 뛰어난 절삭력의 비결은 편집의 힘, 그리고 미리 준비된 재료에 있었다. 본 광고에서는 요리사는 없고 사장을 포함한 건장한 남성들이 연습해서 시연한 거라고 한다. 대형 마트 등에서 이루어진 실제 시연회에서는 매번 시연회 할 때마다 공구용 숫돌로 잘 갈아서 철저하게 준비해두었고 몇 주간의 연습과 칼날의 각도, 나무 종류 등 사실상 과장광고의 효과를 제대로 본 제품이다. 게다가 독일제라고 광고하던 칼날은 전부 중국제 저가형 스테인리스 제품을 국내 업체가 가져다가 포장만 해서 판매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이드로마라는 회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회사이고 다른 광고에 나오는 뮬렉스(Mulex)라는 독일의 주방용품 제조사는 실재하지만 창업 이래 식칼은 만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제이커머스에서 판매한 100년 장미칼 같은 경우는 티타늄 골프채는 티타늄이 아니었고, 무쇠 자물쇠는 연철이었고, 품질 보증 기간은 100년이 아니라 0일이었다라는 것 때문에 공정거래위에 의해서 과장광고로 인한 과태료와 시정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1년 8개월이나 지난 지금, 시정 명령은 아무 의미가 없다. 최종 결론은 믿을 놈 하나 없다.”
결론은…. 정치인이 말하는 공약이나 경력들도 조목조목 따지고 파헤치고 뒤집고 검토하고 비교하고 그렇게 한 뒤에 믿을 건지 말 건지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도 교묘하고 교활하게 조작하는 바람에 홀딱 속아 넘어가는 일이 많으니 해 두는 말이다.
2018.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