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기, yiwoogi 2015. 4. 28. 15:07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다. 운이 좋다고 할까. 어떤 단풍은 봄에 새싹 날 때부터 갈색이거나 빨간 색이다. 평생 연둣빛도 신록도 암록색도 지녀보지 못한 채, 그래서 봄이라는 말도 낯설고 봄바람 봄처녀 같은 말도 모른 채 일생을 보낸다. 가을에 울긋불긋 물들면 다들 예쁘다고 사진을 찍긴 하지만, 봄에는 봄이라서 멋내고 싶고 가을엔 가을이라서 뽐내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으랴. 나무라 한들 어찌 그런 마음이 없으리.

 

이 단풍은 천만다행으로 봄다운 봄을 보내고 있다. 말갛고 투명한 연둣빛이 제대로 물들었다. 여름을 재촉하는 빗줄기를 흠씬 들이켜는 이파리에는 겨울 내도록 땅 속에서 기다려온 설렘과, 불과 몇 달 뒤 알록달록 물들어 뭇 시선을 붙들어둘 가슴 두근거림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약한 바람에도 반응하여 가늘게 흔들리는 순정을 보며, 빙그레 웃음 지어본다.

 

봄비 맞으며 단풍 곁을 지나다가 문득 발길을 멈추고 사진을 두어 장 찍어둔다. 가는 봄이 아쉬워서이고, 그래도 봄을 제대로 누리는 단풍이 반가워서이고, 비를 머금은 잎사귀 속에 꿈틀거리는 가을날을 향한 그리움을 모른 척할 수 없어서이다. 그리고...

 

어제, 오늘 드러누웠던 병원 침대의 온기가 되살아나서이기도 하다. 손등에, 팔에 링거 수액을 꽂아놓고 바라본 천장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지, 오고가는 간호사 누나들의 얼굴이 어찌 생겼던지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렇게 드러누워 있으니 참 그립다, 나무도 풀도 꽃도 새도 나비도 물도 하늘도 구름도...사람도’하던 것이었다.

 

여린 단풍잎을 보며 단단해진 그리움과 보고픔, 그리고 무거워진 외로움을 조금 달래보았다. 이렇게 다시 걸어 나와 걸어 다니며 물먹은 연둣빛 단풍을 보게 되니, 참 운도 좋고 복도 많다 생각하며... 참 고마운 세상이다 느껴보며...



 

2015.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