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기, yiwoogi 2015. 1. 1. 22:26

국민학교 6학년 과정을 마치고 중학교 입학을 앞둔 때였다. 두 살 많은 중학생 작은형에게 뭘 준비해야 할지 물었다. 일단 영어를 배워야 하니 영어공책을 사서 알파벳부터 배우라고 했다. 영어라. 국민학교 앞 문방구에는 영어공책이 없어 진주중학교 앞까지 가서 공책을 샀다. 서점에 가서 알파벳 쓰기 교본도 한 권 샀다. 영어공책은 음악공책처럼 네 줄이 좍좍 그어져 있었는데 위에서 세 번째 줄은 빨간색으로 그어져 있었다. ‘나도 이제 중학생이 된다.’는 뿌듯함을 손끝에 모아 알파벳을 써보았다. 인쇄체 대문자, 인쇄체 소문자, 필기체 대문자, 필기체 소문자 따위 종류별로 써보았다. 어렵지는 않았지만 무슨 글자에 대문자, 소문자가 따로 있고 인쇄체, 필기체는 또 뭐람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작은형의 영어단어장을 넘겨보며 단어도 눈에 익혔다. 며칠 영어를 쓰고 읽어 보니 알파벳 26글자는 대충 외워졌고 ‘middle school’이 중학교이고 나는 ‘student’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작은형과 나이가 같은 재종형들이 모여 노는데, 영어를 조금 배우면서 도무지 알 수 없겠는 단어에 대해 물어보았다. ‘HYUNDAI’라는 영어 단어를 적은 자동차들이 다니던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재종형은 대뜸 그것도 모르나? 그게 현대아이가?”라며 놀린다. 현대? 그걸 내가 알 턱이 있었겠나. 재종형은 온 동네 돌아다니는 트럭이나 택시나 버스나 다 현대에서 만든다 아이가?”라며, 6학년 3월에 안간에서 진주로 이사 온 나를 놀렸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들기는 그렇게 쉬웠던 것이다.

그 순간, 밑도 끝도 없이, 세상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함이 두려워졌다.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도 두려웠고 온 세상에 현대가 차고 넘친다는 사실도 무서웠다. 우리 가족이 안간에서 모 심고 타작하고 소, , 염소 키우며 어렵게 먹고살 동안에 도시에서는 현대가 영어이름을 달고 세상을 활보하고 다녔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진주에서는 웬만한 거리는 버스를 타고 다녀야했다. 애들은 틈만 나면 삼치기라고 하는 짤짤이를 했다. 담방구나 제기차기, 타잔놀이를 하는 놈은 없었다. 그들과 6학년을 함께 보냈으나 여전히 나는 개밥에 도토리아니면 하릴없는 이방인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작은형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방바닥에 등을 깔고 이불을 덮고 누웠다. 건넌방에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 곰례야같은 드라마를 보는지 조용했다. 잠잘 시간이었는데 잠은 오지 않고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이어갈 뿐이었다. 고향마을 안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이었다. 개울에서 송사리, 미꾸라지 잡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이었다. 여름날 마당가에 모깃불 피워놓고 평상에 누워 밤하늘 별을 셀 수 있을까. 불가능이었다. 개구리 잡아 뒷다리에 굵은 소금 뿌려가며 구워먹을 수 있을까. 불가능이었다. 학교 갔다 오면 곰배(고무래) 둘러메고 쟁기질한 논으로 달려가 흙덩이 깨며 뛰놀 수 있을까. 불가능이었다. 보릿대 이리 접고 저리 접어 귀뚜라미 집을 만들어 천장에 매달아 놓고 메뚜기나 잠자리를 잡아넣어 볼 수 있을까. 불가능이었다. 앞으로는 오로지 불가능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불가능과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을 그때 조금이라도 깨달았던 것일까.

앞으로는 오로지 영어단어를 외워야 했고 수학공식을 익혀야 했고 영어가 만들어내는 세상에 물들어야 했고 수학공식이 만들어내는 문제를 풀어야 했다. 중학생 되는 게 두려워진 것이다. 더 철든다는 게 무서워진 것이다. 나보다 먼저 HYUNDAI를 알고 짤짤이에 능수능란하며 영어 필기체를 끊어짐 없이 죽 이어 쓰는 놈들과 어울려 배우고 살아야 한다는 게 까마아득하기만 했던 것이다. 겁났다.

고향의 봄을 조용조용 불러봤다. 작은형은 좀 조용히 해라.”고 한마디 했을 뿐 보던 책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고향의 봄을 부르며, 봄날 복숭아꽃, 살구꽃 피어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진달래 꽃잎 따먹으며 뒷동산을 뛰어놀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자두나무에 올라가 한 자리에서 열댓 개를 따 먹고 신 입맛을 다시던 내가 되어 있었다. 눈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작은형은 훌쩍이는 나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가능은 너무나 컸고 나는 아직 많이 작고 어렸던 시절이다. 2015.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