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에 생각해 본다ㆍ2
진주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
1994년 5월 7일 진주시 <옥봉성당>에서 <진주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을 창립했다. <우리말 연구소>를 운영하시던 고 이오덕 선생님이 직접 오셔서 격려해 주셨다. 회장은 박종석, 편집위원은 서정홍, 박종석, 이영선, 김선옥, 이우기였다. 뒤에 이경미, 백은숙이 함께했다. 우리의 구호는 ‘말을 살려야 겨레가 삽니다’였다. 회보 <우리말 우리글> 첫 호를 6월 15일 냈다. 회비를 내고 회보를 받아보는 회원은 6월까지 101명, 7월까지 172명 이렇게 불어났다.
모임이 하는 일은 여섯 가지였다. 첫째 우리말 우리글을 아끼고 사랑한다. 둘째 남의 나라에서 들어온 말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을 쓴다. 셋째 어려운 말보다는 쉬운 말을 쓴다. 넷째 글은 쉽게 쓰고 바르게 적는다. 다섯째 글은 중국글자나 알파벳을 섞어 적지 않고 한글로만 적는다. 여섯째 언제 어느 곳에서나 우리말 우리글을 살리는 데 앞장선다. 이것이다.
회보에는 우리말 우리글이 처한 현실을 되돌아보고, 우리말 우리글을 살려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글을 실었다. 주로 편집위원들이 글을 많이 썼고 일반 회원들이 글을 보내왔다. 신문에서 고쳐 써야 할 낱말을 찾아 바르게 고쳐 보이는 일도 했다. 우리말을 잘 살려 쓴 학생들의 시도 실었다. 너무 지루하지 않게 가로세로 우리말 풀이 문제도 실었다. 처음 16쪽이던 회보는 24쪽으로 늘었고, 그 사이 회원도 많이 늘었다. 지금 기억하건대 500명 가까이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엔 사무실이 없었다. 박종석 회장 집 또는 편집위원이 근무하는 학원 교실에서 공부하고 회보 편집하는 작업을 했다. 회원들의 주소를 하나하나 떼어 붙여 우체국으로 들고 가서 ‘요금별납’ 도장을 또 하나하나 찍는 수고로운 작업을 웃으며 즐겁게 했다. 보람이 넘쳤다. 그 사이 우리 모임을 소개하는 신문 보도가 더러 나곤 했다. 우리 모임이 힘차게 체계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모임을 이끄는 박종석 회장의 타고난 능력과 기질 덕분이었다. 그의 능력과 기질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났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모임 이름을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으로 바꾸게 되었고 회보도 두꺼워졌다. 봉곡동에 있던 ‘진주사랑모임터’를 사무실로 쓰게 되었다. 진주 이외의 지역에서 우리말 우리글 운동을 하시던 남기심, 남점성 선생님 같은 분들이 글을 보내오게 되었다. 1996년 한글날에는 한글학회에서 주는 ‘국어 운동 공로 표창’을 받았다. 1997년 1월 <와이프가 계란 사러 슈퍼에 가는 세상>(청학사)이라는 책을 냈다. 그동안 회보에 실은 글을 간추리고 고치고 더하여 묶은 것이다. 출판기념회를 1월 24일 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 뒤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서울에 있던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과 함께 일을 하기도 했는데, 진주 쪽 일꾼들의 삶에 변화(이를 테면 직장을 옮기거나 결혼을 하거나)가 생겨 모임은 서서히 힘을 잃었다. 이대로, 김경희, 김수업 선생님을 뵌 것도 이즈음일 것이다. 올해 한글날을 앞두고 그때 열심히 펴내던 회보를 꺼내 보니 종이는 누렇게 얼룩졌으나 우리말과 글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사랑, 그리고 열정은 그대로 묻어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며 산다.
2014.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