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기, yiwoogi 2014. 6. 18. 10:08

1983년 고등학교 1학년 때다. 난데없이 수업도 안하고 교실 스피커에서 축구 중계가 들려왔다. 몇몇 친구는 자취방으로 달려갔다. 멕시코에서 열리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 팀이 4강전을 치르고 있었나 보다. 나는 무슨 난리가 난 줄 알았다. 지금 자료를 뒤져보니 8강전에서 우루과이를 물리치고 4강전에서 브라질에 져 폴란드와 3~4위전을 한 모양이다. 결국 4등 했다. 당시 텔레비전 시청률이 83%였다고 하니 가히 놀랄 만하다. 그래도 나는 그게 뭐 어때서?”라고 말하던 사람이다. 죽기 살기로 오로지 공부만 시키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수업도 포기하고 축구 중계를 듣게 해 주다니.

19986월 프랑스 월드컵이 열릴 때다. 결혼식(6.14.) 전날 멀리 안산에서 아내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광주와 대전에서 후배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여관 두 칸을 잡아놓고 밤새 월드컵 응원을 했다. 결혼을 핑계로 단체 응원전을 한 것이다. 나는 밤샘하는 것은 좋지만 결혼식에 늦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결국 과음한 몇몇은 지각했다. 그렇다고 결혼하는 데 지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축구 그게 뭐라고?”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이기면 어떻고 지면 어때서?”라는 생각도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온 나라가 붉은색 물결이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그날의 함성이 지금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때 여중생 심미선, 김효순 양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는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부분 국민들은 이 사건을 외면했다. 나중에 촛불시위가 전국을 뒤덮긴 했지만, 그건 축구가 끝난 덕분이었다. 축구 응원하던 열기로 미군 범죄를 규탄했다면 그놈들이 미국으로 빠져나가 무죄 석방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다. 나는 축구보다 위대한 건 없는 것일까 생각했다.

2006년 독일,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월드컵 이면에 감춰진 피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뉴스나 책은 간혹 나오고 있지만 작은 공 하나에 쏠린 지구 사람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지는 못한 것 같다. 2014년 지금 우리나라엔 월드컵보다 수만 배 중요한 일이 많은데도 월드컵은 블랙홀이 되는 것 같다. 국무총리 후보, 교육부장관 후보,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고발당한 국회의원 등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더 많이 필요한 시기이다. ‘세월호희생자 12명은 차가운 바다 속에서 몸과 마음이 분해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축구 그게 뭐라고 우리는 이러는 것일까. 우승을 한들, 꼴찌를 한들 그게 뭐라고? 2014.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