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즐거움

이경석-그를 만나다

이우기, yiwoogi 2009. 1. 19. 09:16

 

 

이경석은 인조 때 병자호란에서 항복한 뒤 그 내용을 삼전도비문에 새길 때 비문을 지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뽑아 쓴 우암 송시열로부터도 비난받은 사람이다. 만일, 지금 우리나라가 외국과 싸워 졌을 때 항복문서에 대통령이 서명하고, 그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면 그것을 누가 쓸 것인가. 청나라 누르하치는 제대로 된 문장으로 지어 비를 세우라 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다시 침입하겠노라고 엄포를 놓고 있던 시절이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장가를 인조가 불렀지만 병을 핑계대고, 거짓으로 악문을 지어 올리는 등 갖은 잔꾀로 다들 빠져나가고 이경석만이 남았다. 그마저 인조와 누르하치의 요구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명분만 찾고 달아나 버렸다면 이후 조선의 역사는 어찌 되었을 것인가.

 

우리는 인조와 병자호란, 그리고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잘 기억하지만, 그 치열했던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이경석이란 사람은 잘 기억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사전-2]에서 만나는 이경석은 자신의 명분보다 더 큰 대의를 생각했다. 그 비문을 짓는 순간 자신은 역사에 오명을 남기게 될 것이고 그의 가족마저 후세 사가로부터 배척당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백성과 겨레의 앞날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우암은 이경석으로부터 천거받아 벼슬에 나아갔다지만 결국 이경석을 비판하고 나선다. 이를 역사의 비정함이라 해야 할까 운명의 야속함이라 해야 할까. 만일 그 당시 누구도 청나라의 마음에 드는 비문을 지어 올리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거센 폭풍우 앞에 한 잎 낙엽같던 조선의 운명은... 이경석은 그 이후에도 주화파와 척화파를 고루 등용하는 정책을 펴 나라를 안정시키고 호란으로 인한 민심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 선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인조 때의 이야기가 하나 더 나온다. 바로 소현세자비 강씨. 조선 왕실 여인 중 가장 먼저 청나라라는 대국을 다녀온 사람, 병자호란의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볼모로 잡혀가는 남편 소현세자를 따라 8년간 청나라로 잡혀가 있던 강씨. 그녀는 청나라에서 왕실의 존엄만 내세우는 안방마님도 아니었고, 울고불고 난리치는 여인네도 아니었다. 청나라로부터 부여받은 땅을 바탕으로 경제를 일으켜 부를 얻고, 그 부를 바탕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구해내는 여장부의 면모를 보인다.

 

8년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아버지이자 국왕인 인조와 대립하게 되고 결국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소현세자의 시체 얼굴 일곱 구멍에서 피고름이 나오고 온몸이 납색으로 바뀌는 등 누가 봐도 타살의 흔적이 역력했으나 그의 시신은 서둘러 매장당하고 만다. 역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비운의 왕세자이다. 그의 부인인 강씨는 폐서인 됐다가 사약을 받고 만다. 청나라에서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이라도 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인조의 완강한 거부 때문에 상가에조차 가 보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빈, 강씨. 역사는 그녀를 잊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다시 살아나 스스로 청나라에서 했던 일들과 말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한국사전 2권]에는 이지함 정약용 정조 김홍도 등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불세출의 영웅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이경석과 소현세자빈 강씨처럼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서는 사라져버린 인물도 등장한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아는 인물들도, 다 아는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잘 모르는 일들을 들춰내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재미있다는 것이다.

 

2009. 1. 19.

이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