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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2022년 나에게 일어난 일 몇 가지

by 이우기, yiwoogi 2022. 12. 30.

올해 나에게 일어난 일 몇 가지

 

‘2022년’이 끝나간다. 이 숫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몇 해 전부터 이맘때 한 해를 돌아보며 나만의 역사를 기록한다. 아주 나중에 한가하고 심심할 때 이른바 회고록 같은 것이라도 써보고 싶은 부질없는 욕심 때문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몇 가지 사건을 정리하다 보면 반성할 일이 눈에 띈다. 아쉽고 미안한 일이 수두룩하다. 다시는 안 그래야지 다짐하지만 그런 후회는 해마다 되풀이된다. 올해도 비슷한 일을 해 본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한 것은, 내가 스스로 목적을 가지고 한 일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도 있기 때문이다. 아주 부끄럽고 면목 없는 일도 있었는데 그건 차마 적지 못하겠다.

 

1. 아들이 전역하고 따로 방을 얻어 나갔다

2020년 8월 24일 공군으로 입대한 아들이 2022년 3월 18일 전역했다. 서류상으로 전역은 5월 23일이다. 그사이 코로나 때문에 나오지 못한 휴가와 군대생활 중 얻은 포상휴가를 합하여 약 두 달 일찍 나왔다. 전역하는 날 비가 왔다. 나는 환영 현수막을 커다랗게 만들어 부대 앞으로 달려갔다. 부대는 사천시에 있어서 차로 달리면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고생한 아들을 안아 주었다. 무엇보다 아들의 군대생활을 힘들게 한 선임이 마지막에나마 상관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것 같아 사필귀정을 느꼈다.

아들은 군대 매점에서 파는 라면, 국수를 사 보냈다. 여성 친척들이 좋아할 화장품도 사서 보냈다. 어머니가 돈을 부쳐주고 일부러 사서 보내라고 한 적도 있다. 또한 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도서구입권을 나에게 양보했다. 보고 싶은 두꺼운 책 여러 권을 한 번에 샀다. 기특하다.

아들의 군대생활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편지를 꾸준히 썼다. 처음 목표는 100통이었는데 90통에서 멈추었다. 예정보다 일찍 전역한 ‘덕분’이기도 하고 내가 마음먹은 만큼 부지런하지 않은 ‘탓’도 있다. 그렇게 쓴 편지를 아들은 고스란히 모아서 갖고 나왔다. 나는 블로그에 저장해 놓은 편지와 이런저런 사진을 얼기설기 편집하여 책자로 묶어 아들에게 선물했다. 크게 반갑거나 고마워하지는 않는 듯했으나, 나중에라도 아버지가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는지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안 와도 할 수 없다. 그만그만한 내용의 편지를 귀찮도록 보냈는데도 내색하지 않은 것도 나에겐 고마움이다. 

아들은 7월부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2학기를 앞두고 대학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겠다고 했다. 내가 주는 용돈은 방값으로 턱없이 모자란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이다. 토, 일요일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한다. 밤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생활 리듬이 깨질 수 있다. 학업에도 지장이 클 것이다. 그래도 아들은 지금까지는 씩씩하게 잘해 낸다. 대견하다. 8월 말 군대에서 넣은 적금을 찾아 방을 얻어 나갔다. 군대 갔을 때 텅 빈 듯하던 집이 아들이 전역하자 좀 찬 듯했다가 다시 텅 빈 집 같이 되었다. 토요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새벽 2시 넘은 시각에 우리 집으로 자러 온다. 깨어나면 반갑다고 안아준다. 안 깨어나면 그만이다. 그렇게 지낸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저녁이라 취한 손님이 제법 오는가 보다. 한 번씩 진상 손님을 이야기한다. 마음속으로는,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한 대 쥐어박아 주었을 법하지만 겉으로는 “그래도 참아라.”라고 말한다. ‘참아라’라고 말하는 마음은 편하지 않다.

 

2.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2019년 중국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2020년 2월 우리나라에도 퍼졌다. 온 세상에 난리가 났다. 내가 속한 대학에서도 외국인 유학생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개인위생이 아주 중요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했다. 몇 명 이상 모이지 마라, 몇 명 이상 모이는 행사는 하지 마라, 마스크 써라, 백신 맞아라 등등 정부는 갖가지 시책을 발표했다. 하루하루 발표되는 확진자 수에 두려움이 커져 갔다. 국내에서 100명을 넘어갈 때, 1000명을 넘어갈 때, 1만 명을 넘어갈 때 심리적 방어선이 무너지고 또 무너진다고 여겼다. 언젠가 나도 걸리겠구나 싶었다.

2022년 3월 30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퇴근 후 진주시 평거동에 있는 ㅅ 이비인후과에 가서 콧구멍을 후볐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을 다녀왔다. 간호사들은 나를 범죄인 취급했다. 확진자가 왜 돌아다니느냐는 듯이 째려봤다. 중죄를 지은 듯했다. 기분이 ‘매우’ 나빴으나 확진자는 할 말이 없었다. 일주일 치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아래층 약국에 가서 다소곳이 앉아있으니 공짜로 약을 주었다. 가족에게 전화하고 사무실에 연락했다. 일주일간 격리되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진주시보건소에서 문자메시지가 득달같이 날아왔다. 격리 기간에 지켜야 할 사항을 알렸다. 이를 어기면 어떤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협박조로 이야기해 놓았다. 무시무시했다. 역모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아무것도 아닌 듯한데 그때만 해도 기분이 몹시 언짢고 무섭고 또한 미안했다.

아내는 시내 게스트하우스로 피난 갔고 아들은 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세 식구 가운데 가장 먼저 코로나19 감염자가 되었다. 미안했다. 부끄러웠다. 2년 하고도 3개월을 용케 잘 버텨 왔지만 속절없이 무너졌다. 며칠 전 저녁에 술자리를 함께한 한 친구가 감염됐다는 말을 들을 때에도 설마했다.

일주일 동안 집에서 일하고 놀고 쉬었다. 아내는 이따금 와서 청소하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아들과 나는 화장실을 시간제로 사용했다. 다행히 가족들에게 옮지는 않았다. 많이 아프지도 않았다. 첫날 온몸이 노곤하고 열이 나며 뼈마디가 쑤신 것 말고는 특별한 증상이 없었다. 많은 분이 전화하여 위로하고 격려했다. 홍삼을 보내주고 죽을 보내주며 응원하기도 했다. 내가 다 나아갈 즈음 사무실 직원 한 명이 감염됐다. 나 때문이다. 한없이 미안했다. 심히 부끄러웠다. 일주일 치 약을 먹으니 일주일 만에 완쾌됐다. 후유증이 없지 않다. 목소리가 전보다 잘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다. 입맛이 없어지더라는 사람도 더러 있던데 나는 그렇지는 않다. 나는 음식을 입보다는 눈과 귀로 먹는 덕분이다.

 

3. 허리가 아파 고생했다

허리병은 고질병이다. 2-3년에 한 번씩 크게 고생한다. 그때마다 한의원으로 갔다. 심한 때는 통증의학과에서 주사를 맞았다. 나름대로 예방하느라 야트막한 산을 오르고 웬만한 거리는 걸었다. 의자에 앉을 때도 허리를 곧추세운다. 하지만 번번이 찾아오는 통증을 어쩔 수 없다.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집에 격리되어 있을 때다. 사흘째였던가 보다. 갑자기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하늘이 노래졌다. 천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이런 급작스러운 통증이 생긴 건 처음이었다. 매우 놀랐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닌가 싶었다. 서 있을 수도 없었고 앉을 수도 없었으며 심지어 누워 있어도 아팠다. 엉엉 울고 싶었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사실은 코로나19로 격리되기 전에 허리가 뻐근하여 한의원을 몇 번 다녔더랬다. 그랬던 것이 코로나19의 영향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갑자기 크게 악화한 것이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는 엉금엉금 기다가 중간에 한번 드러누워 쉬어야 했다. 화장실 가서는 힘을 줄 수 없었다. 화장실 가는 횟수를 줄이기 위해 밥을 줄였다. 그런 한편 여기저기 소문을 내었다. 페이스북에 “나 죽겠다.”라고 써 올리기도 했다. 많은 분이 위로의 말씀을 전해 왔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조언도 많이 해 주셨다. 정말 병은 소문을 내라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병원에 가야 했으나 갈 수 없었다. 코로나19 격리 해제가 먼저였다. 그렇게 견딘 3-4일은 지옥이었다. 지옥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지옥이었다. 그중 경상국립대 연구부총장의 격려와 위로와 조언은 큰 도움이 되었다. 본인도 똑같은 시기에 허리 통증을 겪고 있었다. 유튜브에 가서 서울대 아무개 교수의 강의를 들으라고 했다. 그렇게 했다. 과연 전문가는 유튜브 안에 다 있었다. 시키는 대로 했다. 자세를 어떻게 하고 허리에 무엇을 받히고 등등 열심히 했다.

드디어 코로나19 격리에서 해제됐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119 구급차를 불러 실려가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엉거주춤한 자세이기는 해도 걸어서 계단을 내려갈 수 있었다. 택시를 불렀고 아들에게 짐을 들렸다. 병원에 가면 그길로 시술이든 수술이든 하고 입원하리라 생각했다. 사무실 일은 아무리 중요한 게 밀려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살고 봐야 할 일 아닌가. 처음 간 병원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진료를 받았다. MRI부터 찍자고 했다. 또 한 시간 이상 기다렸다. 병원에 가면 기다리다가 아파 죽는다는 말이 가히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MRI를 판독한 의사는 오늘 오후에 시술하면 내일 퇴원할 수 있다고 했다. 시술을 위한 상담을 따로 했다. 280만 원가량 든다고 했다. 통장 잔액을 떠올렸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코로나19 격리 후 3일이 지나지 않으면 입원도, 수술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무슨... 아무튼 다시 집으로 왔다. 아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매우 부끄럽고 미안했다. 아비란 사람이 이 모양밖에 되지 못하여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그 사이에 연구부총장께서 전화를 하여 “절대 시술이든 수술이든 하지 말라.”라고 강조했다. 본인도 병원을 다니는데 수술, 시술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전날 촬영한 MRI 영상을 받아서 다른 병원에 갔다. 의사는 시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라고 했다.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했다. 주사는 세 번 맞았다. 약은 한 달가량 먹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잠잘 때 허리 베개를 받혔다. 유튜브에서 본 서울대병원 어느 교수의 책을 사 읽으며 공부했다. 아침마다 9층 계단을 두 번 올랐다. 서서히 나았다. 한 달쯤 지났을 때 확연히 나아진 걸 느꼈다. 두 달쯤 지났을 때 많이 나았다 싶었다. 서서히 조금씩 괜찮아졌다. 일상을 회복했다. 다행이었다.

그사이에 허리 안부를 물어주고 걱정해준 많은 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12월 말 요즘도 허리는 괜찮은지 묻는 사람이 있다. 그만큼 내가 엄살을 많이 부렸다는 뜻이다. 그 일 지난 뒤 인문대학 어느 교수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면서 내 경험을 물었다. 나는 자세히 설명했다. 그 교수님도 지금은 허리가 안 아프다. 물론 수술도, 시술도 하지 않았다. 결론은, 허리가 아프면 당장 죽을 것 같다. 의사는 수술이나 시술을 권한다. 시급히 치료한 뒤 중요한 일을 해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최대한 안 하는 게 좋다. 허리 통증, 흔히 디스크라고 하는 병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꾸준히 운동을 하면 대부분 낫는다.

 

4.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31번 관람했다

2022년 3월 1일부터 12월 16일까지 극단 큰들의 마당극을 31번 관람했다. <최참판댁 경사났네>와 <찔레꽃>을 각각 7번 보았다. <오작교 아리랑>과 <효자전>은 각각 6번 보았다. <정기룡>은 3번 보았다. <남명>과 <목화>는 각각 1번 보았다.

하루에 두 번 본 날도 4번 있었다. 산청 동의보감촌과 마당극마을을 왔다 갔다 했다. 한국선비문화연구원과 동의보감촌을 이어 달린 적도 있다. 대원사 지나 밤머리재가 제법 가파르고 구불구불한데 굴을 뚫어 놓는 바람이 한결 수월해졌다. 산청한방약초축제 기간에는 2번밖에 보지 못했다. 매우 아쉽다.

하동으로 7번 달려갔고 산청으로 23번 날아갔다. 하동 가는 길은 시속 60km이므로 달려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마음이 먼저 달려갔다는 뜻이다. 나머지 한 번은 경상국립대 가좌캠퍼스에서 보았다. 공무원직장협의회와 직원 교육을 담당하는 총무과가 잘 의논한 덕분이다. 경상국립대에서 열린 마당극은 두 번째이다. 그사이 <최참판댁 경사났네> 200회 기념공연이 있었고, 큰들 창립 38주년 기념 정기공연(8월 27일)이 있었다. 정기공연 두 번째는 태풍 때문에 열리지 않았다.

오래 기억에 남을 공연은 <최참판댁 경사났네> 200회 공연(5월 1일), <찔레꽃> 첫 관람(7월 9일), <효자전> 경상국립대 공연(10월 18일), <목화> 제작 발표회(12월 16일)이다.

함께 마당극 보러 간 사람도 기억난다. 한 분 한 분 적지는 못한다. 안산에서 온 아내의 친구와 6월 11일 마당극마을에서 <정기룡>을 보고, 마을에서 하룻밤 잔 날은 기록해 두고 싶다.

2018년 시작한 마당극 보기는 이제 157회까지 다다랐다. 어쩌면 2024년에 200회가 될 것 같다. 내년에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올해만큼만 마당극을 즐길 수 있기를 빌어본다. 마음이 준비되어 있으니 충분히 이뤄 내리라 믿는다. 그저 모든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런 마음을 추스르며 큰들 가족이 등장하는 새해 달력을 두 개 만들었다. 3년째다. 하나는 사무실 컴퓨터 화면 옆에 세웠다. 하나는 큰들에 보냈다. 지난해엔 3개를 보낸 듯한데, 주머니 사정으로 줄였다. 어쩔 수 없다. 또한, 큰들 페이스북에 나오는 사진을 내려받아 사진첩도 두 권 만들었다. 2년째다. 하나는 내 애장품이 될 것이고 하나는 역시 큰들로 보냈다. 그들에게도 기념품이 되면 좋겠다. 내년 1월에는 그동안 쓴 마당극 관람 후기를 모아 엮어볼 참이다. 이 일마저 완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 ‘기사 문장 다르게 써보기 연습’을 계속했다

페이스북에 ‘이런 기사 문장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고 있다. 2021년 11월 2일 시작했다. 처음 목표는 2022년 12월, 그러니까 1년 동안 부지런히 글을 써서 책 한 권 분량을 엮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감염이라는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간에 끊겼다. 12월 31일 현재 225꼭지를 썼다. 책 모양으로 편집한다고 생각하면 200쪽이 안 되는 분량이다. 페이스북에는 이 가운데 3분의 2정도 올렸다. 

한동은 댓글이 많았다. 스스로 고쳐본 기사 문장을 올려주기도 했다. 더불어 배운다는 귀한 말씀을 적어주신 분도 많았다. 그런 반응은 점점 줄었다. 댓글을 읽고 더 진지하게 자세하게 토론을 해 나가지 못한 내 탓이다. 상관없이 혼자서 마라톤처럼 달려나간다. 가다가 보면 목표한 곳에 도착하겠지.

페이스북에 글 올릴 때 제목은 ‘이런 기사 문장이 있다’라고 쓰지만 실제 내가 구상하는 책 제목은 ‘기사 문장 다르게 써 보기 연습’이다. 기사 문장을 뜯어보겠다는 뜻이다. 맞느니 틀리느니 따지는 게 아니라 다르게 쓸 수도 있다는 것을 공부하자는 뜻이다. 그것도 결론을 짓는 게 아니라 연습이다. 굉장히 소심한 제목이다. 이 제목이 마음에 든다. 2021년 11월 처음 시작할 때 2022년 12월에 책을 낼 생각이어서 머리말까지 미리 써 두었다. 그 머리말을 여기에 올려둠으로써 흐트러지기 쉬운 갈대 같은 내 마음을 다잡아 본다.

“지난 한 해 동안 페이스북에 ‘이런 기사 문장이 있다’라는 제목에 많은 글을 올렸다. 신문, 방송, 잡지의 보도 기사 문장을 읽다가 좀 이상하다 싶은 것을 골라서 내 생각을 말하는 글이다. 어떤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지만 대부분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을 말했다. 문제를 지적하고 정답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자는 권유다. 언론 보도 기사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공공언어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문장을 쉽고 간단하게 쓸까, 어떻게 하면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쉬울까 하는 고민을 드러냈다. 외국어를 튀긴 듯한 문장을 우리말처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언론 보도도 공공언어이므로 어문 규정을 잘 지키는지 살폈다. 필요 없이 사용한 외국어 낱말도 살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다. 말과 글에 민감한 편이고, 되도록 우리말 우리글을 살려 쓰자고 주장한다. 욕심이라면, 첫째 스스로 글 쓰고 말할 때 조금만 더 신경 쓰자는 다짐이고 둘째 누군가 언젠가 글 쓰고 말할 때 한 번만 더 생각해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언론 보도 읽고 글 쓰는 일이 직업이라서 이런 작업은 전혀 어렵지 않고 버겁지 않고 매우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이런 글을 쓰는 시간이 나에게는 머리를 식히는 탈출구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최소 2년 정도 더 이어져야 할 듯하다. 더 많은 사례를 모아야겠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릴 때엔 비전문가로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썼지만, 책 모양으로 엮어볼 요량이라면 좀 더 전문성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국어문법 관련 책을 다시 찾아 읽는다. 내 주장이나 의견이 반드시 맞아야 하는 것은 아닌 ‘연습’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이론적 근거나 다른 전문가의 의견도 좀 포함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작업을 하는 줄 아는 경남도민일보 젊은 기자들이 나를 불렀다. 11월 17일 창원 경남도민일보 본사에 가서 입사한 지 3년 이내라고 하는 기자 일곱 분께 강의를 했다. 그럴 만한 깜냥은 안 되지만 그래도 의견을 서로 나누다 보면, 더 멋지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기사 문장이 아름답다는 것은, 화려한 미사여구가 동원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 간단명료하되 정곡을 찌르는 문장을 말한다. 여기서 정곡을 찌른다는 말은, 단순한 ‘문장 쓰기’를 말하는 게 아님을 알 것이다. 아무튼 간단명료하고 짧으면서도, 담아야 할 내용을 빠뜨리지 않는, 우리말 우리글을 잘 살려 쓰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런 날이 있었다.

 

6. 내 인생 세 번째 자동차 ‘전기차’를 샀다

기아 ‘쎄라토’를 2007년 4월에 샀다. 그 전에 타던 ‘아벨라’는 1997년 9월에 샀다. 이제 내 인생 세 번째 자동차를 샀다. 기아 ‘니로플러스’라는 전기차이다. 아직은 전기차가 이르다는 나와 그럴수록 빨리 사야 한다는 아내는 의견이 달랐다. 결국은 아내 말을 따랐다. 그게 행복의 비결임을 안다.

기름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금리도 덩달아 오르던 때이다. 러-우전쟁 탓이었다. 우리나라가 국제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흔들리던 때이다. 전기차를 사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됐다. 또한 할부를 하지 말고 현금으로 차를 사야 할 까닭이었다. 적금을 풀고 보험 환급금을 보태고 비상금을 공개했다. 4900만 원짜리 전기차를 3500만 원에 샀다. 정부와 지자체 보조금이 1300만 원이나 됐다. 대략 그렇다.

전기차는 좋았다. 충전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하거나 충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만 빼면 다 좋았다. 주로 충전한 곳은 경상국립대 가좌캠퍼스 무료주차장이다. 다음은 경남도문화예술회관 주차장이다. 평거동 공영주차장에서도 자주 충전했다. 멀리 가까이 돌아다닐 때엔 반드시 충전소가 어디쯤 있는지 확인한다. 남은 주행거리가 얼마인지도 확인한다. 충전하는 시간에 무엇을 할지도 생각한다. 책을 꼭 넣어다니는 건 그 때문이다. 

전기차여서 갖는 기능은 아니지만, 쎄라토 이후 우리나라 자동차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편리한 기능이 많았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크루즈 기능은 꽤 쓸만했다. 앞차가 천천히 가면 자동으로 속도를 낮추고 뒤차가 따라오는데 좌, 우회전하려고 하면 신호를 준다. 신호등에 멈추었다가 앞차가 가는데도 가만히 있으면 또한 신호를 준다. 친절하다. 전기차라서 가진 기능은 아니다. 

6월 3일 자동차 영업사원으로부터 등록한 차를 받았다. 주행거리가 30km도 되지 않았다. 12월 31일 현재 8023km를 달렸다. 처음엔 90% 충전하면 주행거리가 500km 이상 나왔다. 80% 충전하면 470km 정도 나왔다. 겨울인 12월에는 80% 충전하면 겨우 350km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전기를 아끼느라 겨울에도 실내 온도를 높이지 않는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이건 아니다 싶다. 정말 겨울이라서 그런 것인지 6개월 만에 축전지의 성능이 그만큼 떨어진 것인지는 내년 봄과 여름을 지나본 뒤 판단해야겠다. 요즘은 자동차에는 90%까지 충전하도록 설정해 놓았는데도 시간으로 40분간만 충전하면 끝이다. 

아무튼 충전하는 법을 배우고 기능을 하나하나 익혀 나가는 과정이 행복했다. 새 차 냄새 가득한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군산으로, 태안으로, 산청으로, 하동으로, 통영으로, 남해로, 창원으로, 김해로 달리던 날들의 추억이 새롭다. 어쩌면 내 인생 마지막 자동차가 될 자동차이다.

 

7. 그 밖에 기억나는 일

- 진주교육청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아내가 5월 31일 계약 해지됐다. 아내는 2년 반 동안 일하면서 사귄 동료들과 익힌 업무에서 멀어졌다. 마흔아홉 나이에 외로움이 컸을 것이다. 아내는 대학시절 친구 두 명과 남해로 9일간 여행을 갔다. 돌아온 아내와 나는 마당극마을로 가서 하루 놀았다. 그때 함께한 한 명과 아내는 10월 15일부터 11월 19일까지 제주도를 갔다. ‘제주 한 달 살이’다. 날마다 보내오는 사진 속에서 아내는 행복했다. 아내는 청소년상담사 공부를 했다. 제주에서 이론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돌아와 12월초 부산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12월 28일 합격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내는 12월 29일 처제 가족과 함께 다시 제주로 갔다. 제주에서 연말을 보내고 새해 첫날 돌아온다. 긴 기간 동안 아내를 여행 보낼 수 있을 만큼 여유 있고 부지런한 나를 칭찬하고 싶다. 내년에는 제주를 가든 육지를 돌든 아내와 좀 긴 시간 여행하고 싶다. 아내도 2023년에는 지천명이니까.

 

- 충남 태안에서 처가 가족 모임을 했다. 7월 2-3일이었다. 6월 3일 산 전기자동차를 몰고 갔다. 7월 1일 금요일 휴가를 내어 아내와 함께 군산으로 갔다. 군산은 두 번째이다. 2018년 12월 아들 대학 합격자 발표하던 날 간 곳이다. 이번 여행에 아들은 동행하지 않았다. 군산에서 1박 하고 안면도를 지나 꽃지해수육장을 지나 보령해저터널을 거쳐 태안으로 달렸다. 태안은 멀었다. 여러 해 전 유조선 기름유출사고가 난 곳이다. 그때 내가 속한 직장에서도 버스 두 대에 직원을 태우고 기름제거봉사활동을 갔다. 나는 가지 않았다. 태안 숙소는 처남이 정했다. 커다란 리조트에 거실, 방 2개, 화장실 1개, 주방 1개가 있었다. 15명이 모였다. 장인어른은 오시지 못했다. 프랑스 사돈 내외는 참가했다. 1박 2일 동안 잘 놀았다. 특히 아내와 손잡고 물이 빠진 바닷가 단단한 모래 밟으며 달빛 바라보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전주에서 군산으로 달리던 20km의 직진 도로도 잊히지 않는다. 참 좋았다. 돌아오는 길은 내비게이션 안내하는 대로 하루 만에 달렸는데 꽤나 멀었다. 그래도 처가 가족들과 추억 한 겹을 쌓았으니 다행이다. 한 해에 한번씩이라도 이런 모임을 계속했으면 좋으련만 그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무엇보다 어른들의 건강이 유지돼야 가능한 일이다. 

 

- 큰들의 ‘공간 오늘’에서 좀 놀았다. 극단 큰들이 진주시 이현동에 놀이터를 만들었다. 지난해 열었다가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거기에는 박춘우 큰들 미술감독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따뜻하다. 세계 여러 나라의 맥주가 냉장고에 가득하다. 안주는 갖고 가거나 배달시켜 먹으면 된다. 공간 오늘에서 여러 모임을 했다. 저녁 먹고 심심할 때 혼자 밤마실 가듯 가서 맥주 두어 병 마시고 온 날도 많다. 어떤 모임을 예약하면 큰들 배우들이 기타 들고 달려와서 노래를 불러주었다.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들어도 번번이 새롭고 신기했다. 마당극 보는 것과 또 다른 매력이다. 목, 금요일마다 열던 문을 10월 말부터인가, 예약이 있을 때만 여는 것으로 바뀌었다. 마당극 공연이 너무 많아진 탓이리라. 그 이후로 나의 발길도 좀 뜸해졌다. 아쉽다. 산청 마당극 마을에도 자주 놀러갔다. ‘주말엔마당극마을’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토, 일요일 오후 또는 저녁 시간에 마을에 가면 피자 굽기, 돌 그림 그리기, 전통놀이를 할 수 있다. 마당극 작품도 볼 수 있다. 공연 이후에는 배우들과 어울려 파전, 김밥, 도토리묵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씩들 할 수 있다. 내년에는 마당극 상설공연과 관계없이 따뜻해질 무렵에서 추워질 때까지 내도록 이런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다.

 

2022년 12월 31일(토)

이우기

 

(사진은 11월 6일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서 찍은 가을 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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