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가 맛있는 계절이다. 찬바람 덕분인지 쓸쓸함 덕분인지 모르겠다. 수족관에 가라앉아 있지 않은 녀석들을 골라 왕소금 위에 얹는다. 살고 싶어 발버둥치지만 짓누르고 있는 뚜껑을 어쩌지 못한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끝내 탈출할 수 없는 나를 본다. 거무튀튀하던 색깔이 주황색으로 바뀌면 익은 것이다. 우리 의식과 사상은 잿빛으로 익어간다. 철듦이 맛있는 나이이다.
버터를 발라 튀겨야 하는 대가리를 싹둑싹둑 자른다. 살을 조금 붙여두는 걸 배려라고 해선 안 된다. 저요, 아니오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세상을 향한 질문을 삭둑삭둑 잘라주지 않으면 밥벌이 대열에서 튕겨나가게 된다. 물음표보다는 말줄임표가 살아가는 데 더 도움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새우라면은 끝이다. 눈이 호강하고 귀가 즐거워한다. 입은 말해 무엇할까. 고단한 행군을 마친 병사가 길가에 앉아 까먹는 삶은 달걀보다 맛있다. 100일 동안 마늘과 쑥으로 연명한 수컷 곰이 동굴을 벗어났을 때 처음 만난 이슬보다 달다. 후루룩후루룩 소리 따라 라면 가락은 찰랑찰랑 춤춘다. 젓가락 놓고 술잔도 내려놓고, 이윽고 말한다. 인생은 결국 라면이구나.
새우가 맛있는 계절이다. 가을비 덕분이기도 하고 살사리꽃 덕분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즐거움과 살아내야 할 서글픔이 교차하는 가을밤, 구부러지고 짜부라진 우리네 인생 거울을 본다. 짭짤하지만 달달한 게 새우구이뿐만은 아니라는 걸 은연중 알게 된다. 그런 밤이 있었다.
2020. 9. 17.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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