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라면죽을 끓여 먹었다. 지난밤 섞은 술기운을 배출하기엔 한참 모자랐다. 오전 내내 잤다. 점심 때는 김치와 참치가 들어간 볶음밥을 차렸다. 열무김치 국물을 해장국 삼았다. 상을 물리고 물 마시는 틈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나는 070으로 시작하는 전화를 이유불문하고 받지 않은 지 오래됐다.
아들이 수신자 요금 부담 통화(콜렉트콜)로 건 전화였다. 반갑고 신기했다. 3-4분 통화에서 건강히 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들은 사회와 군대의 경계가 높다는 것을 이제서야 느낀 듯했다. 울컥하는 아들에게 ‘잘 즐기라’고 말해주었다. 엊저녁 술 마시러 달려 나간다고 받지 않은 070 전화도 아들 전화였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는 070도 받아야겠다.
군대에서는 모든 것을 지급하므로 사회 물건을 갖고 갈 게 없다. 그런데 그게 아닌가 보다. 마스크, 무릎보호대를 보내란다. 커다란 플라스틱 물병(텀블러)도 필요하단다. 왜 필요한지 어떻게 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니 보내줄 수밖에. 요청한 것 가운데 가족사진도 있다. 가족사진이라는 말에 괜스레 목이 따가워진다. 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
차를 몰고 여기 저기 돌아다녀 필요한 것을 다 준비했다. 아내는 코팅지에 사진을 넣어 예쁘게 마무리했다. 군대 보내고 나면 아들과 관련하여 별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내일은 우체국 가서 보내야 한다. 마침 소대장이 개설한 밴드에는 보낼 수 있는 것과 보내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해 정리해 놓았다. 친절하기도 하지.
심심하고 궁금하여 여기 저기 검색을 해봤다. ‘공군 신병’으로 검색하니 벌써 수많은 고수들이 카페를 개설해 놓고 각종 안내 자료를 올려 놓았다. 인생도처유상수라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입소식을 못했지만, 지난해 치른 입소식 동영상도 25분 동안 보았다. 주마다 무슨 훈련을 하는지도 알려준다. 자녀를 군대에 보낸 부모가 알아야 할 정보가 너무 많다. 그걸 다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대신 훈련을 받아 줄 건가, 대신 총을 닦아 줄 건가.
혀를 끌끌 차면서도 하나하나 읽어 본다. 입대하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겠다 싶은 것도 있고 안다고 한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도 엄청나다. 이런 걸 주워모아 정리해준 분들의 정성은 무척 고맙다. 하지만 끝까지 읽지는 못하겠다. 눈만 아프다. 그저 군대 보냈으면 그것으로 끝이어야지, 그래야 21개월 동안만이라도 속 썩이지 않고 근심걱정 없이 마음 편히 보낼 게 아닌가.
6시쯤 이웃 이정희 선생이 전해 준 누런오이(노각)를 장만했다. 된장찌개를 끓였다. 밥상 앞에 놓고 마주 앉아 맛나게 밥을 먹었다. 먹다 남은 다래와인도 비웠다. 설거지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 배출했다. 씨비에스 라디오 틀어 놓고 따라 흥얼거린다. 아들 전화 한 통에 기운을 낸 것일까. 오후 내내 울어댄 천둥 때문에 간이 졸아든 것일까. 구분되지 않는 일요일이 다 간다.
2020. 8. 30.
이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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