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면 미곡리에 갔다. 내 고향은 미천면 숲골이다. 미천(美川)이나 미곡(美谷)이나 참 좋은 이름이다. 학형이 미곡 어드메쯤에 땅을 구했다.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게 꼭 맞춤한 밭이다. 먼저 이 땅을 갖고 있던 사람이 부지런히 밭을 일군 덕분에 온갖 유실수가 줄지어 자라고 있다.
학형은 한 달 반 남짓 기간에 주말마다 발걸음을 놓았다. 덕분에 나무들은 꽃 진 자리에 앙증맞은 열매를 달았고 영산홍, 수선화, 수국 들이 꽃을 피웠다. 양파는 잎이 싱싱하고 마늘도 씨알이 굵어지고 있다. 호박넝쿨이 고개를 내밀었고 상추나 시금치나 고추나 당귀나 모두 한두 뼘씩 제 땅을 차지했다.
주인장 학형과 그의 아들 말고는 내가 첫 방문객이다. 이리 둘러보고 저리 재어보고 요리 돌아보고 조리 살펴봐도 좋기만 하다.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쪼이고 바람은 선선하게 돌아 나간다.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밭에는 잡초로 이름지어진 온갖 풀들이 경쟁하듯 돋아나고 자라나고, 간혹 웃자라고 있다. 주인장은 그러거나 말거나 개념치 않는다.
없는 게 없다고 할 정도로 여러 가지 물건을 갖춰 놨는데, 농기구나 살림살이나 전자제품들도 제법 구색을 갖췄다. 가령 삼겹살 구워 막걸리 한잔 할 수도 있고 라면을 요기로 끓여 먹는 데도 모자람이 없다. 더운 여름날 땀 식히기 위한 평상도 조립해 놓았고 더 곤하면 코 골고 자도 될 만한 컨테이너도 깔끔하다.
너덧 시간 앉아서 새 노랫소리를 듣고 땅에 힘 올라가는 소리도 듣고, 들리지는 않지만 골짝에 세 들어 사는 산신령의 흥얼거림도 느껴 보았다. 주인이 큰 마음 먹고 심은 나무와 꽃들은 주인을 배반하지 않고 봄을 즐기고 있다. 우리는 삼겹살 안주 삼아 막걸리 마시며, 안빈낙도란 이런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뽑아야 할 잡초는 무성해지고 매어야 할 김도 지천이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다 까닭 있는 존재이므로 애달캐달 안달복달할 게 무에 있겠나. 그저 조금 부럽고 아주 많이 고맙다.
2019. 4. 27.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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