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안경

by 이우기, yiwoogi 2019. 3. 28.

선천적으로 눈이 좋았다. 시골에서 자란 덕분이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고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 형광등 아래서 밤늦도록 공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시력을 재면 늘 2.0 또는 1.2를 기록했다. 군대서는 영점 사격할 때 내 표적에 총알 구멍 뚫린 것도 보였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도 들었다. 내 몸 값은 최소한 구백 냥은 넘는다고 자신했다.

 

경남일보 교열부에 들어간 게 19927월이다. 11시 또는 12시까지 새하얀 종이 위의 개미 같은 글자들을 읽었다. 개미 중에서도 아주 작은 종족이다. 빨간색 펜으로 고쳤다. 2년쯤 지나자 눈에 신호가 왔다. 커피숍에 앉아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배를 알아보지 못했다. 안경점에 갔다. 안경은 비쌌다. 3~5만 원짜리를 샀다.

 

안경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겨울에 버스를 타면 눈앞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라면을 먹기 위해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눈앞이 흐려졌다. 어쩌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면 옷이 젖는 것보다 안경이 더 신경 쓰였다. 술에 취한 어느날 세상을 향해 큰소리를 지른 뒤 안경을 집어던졌다. 깨졌다. 다시 안경점에 갔다.

 

19975월경 교열부를 벗어났다. 이른바 외근 취재 기자가 됐다. 몇 달 있으니 눈앞이 다시 흐려졌다. 안경점에 갔다. 이번에는 눈이 다시 좋아졌다고 했다. 가까이 있는 것도, 멀리 있는 것도 다 잘 보였다. 안경을 버렸다. 스파이더맨 2에서 초능력을 잃었다가 다시 초능력을 회복할 때 피터는 안경을 끼면 흐리고 벗으면 맑고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랬다.

 

 

 

그로부터 20년 이상 지났다. 몇 해 전부터 가까이 있는 글자가 잘 안 보였다. 눈 앞에서 뭔가 희미한 티끌이 날아다니는 현상도 목격됐다. 혹사해온 눈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텔레비전도 많이 봤고 밤늦도록 책을 읽고 글도 썼다.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랴 쳐다본다. 그러면서도 눈 영양제를 먹는다거나 한 시간에 한 번씩 바깥 경치를 보는 등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올 게 오는 것 아니냐고 위로했고 각오도 했다.

 

은행에 가서 전표에 글을 쓰기 힘들어졌다. 병원에 가서 검진표에 동그라미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바카스병에 적힌 글자도 읽을 수 없었고 새로 나온 라면 봉지에 적힌 조리법도 해득할 수 없었다. 아들 성적표를 읽으려고 해도 거리 조절을 해야 했다. 스마트폰 카톡이나 문자를 보내고 받는 일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기 어려웠다. 참기 힘들었다. 먼 데 있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흐릿하고 희미하고 아득했다. 무서웠다.

 

안과에 갔다. 몇만 원을 들여 여러 가지를 검진하더니 아직 안경을 쓸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안도했다. 녹내장인지 백내장인지 신호가 감지되니 다시 한 번 오라고 했다. 약 처방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안과에 가지 않았다. 좀더 버텨볼 심산이었다. 간이 커졌다. 겁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최근 다시 안경점에 갔다. 눈앞에다 동그란 유리 여러 종류를 갖다댔다. 흐릿하던 게 뚜렷하게 보였다. 멀리 있어도 선명하던 것은 도리어 흐리마리해졌다. 근시라고 하는지 원시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무튼 노환(노안)이라는 말이므로. 신문을 볼 때, 책을 읽을 때 요긴한 안경을 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돈은 유리 1만 원, 1만 원 하여 2만 원짜리도 있다고 했다. 안경사는 내 주머니가 가벼운 것까지 꿰뚫어보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은 날이어서 다음에 온다 하고 문을 나섰다.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전조등은 밝기만 하고 그 불빛에 비치는 거리 간판과 사람 얼굴은 선명한데, 내 앞 발밑은 어둡기만 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하는 듯이.

 

보름쯤 뒤에 다시 안경점에 갔다. 아내가 동행했다. 뭐든 맞춤한 것을 고르는 데는 젬병인 줄 뻔히 아는지라 같이 가자고 내가 제안했다. 다시 검안하고 테를 고르는 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기다리면서 포도 주스 한 잔 마셨다. 시원하고 달았다. 안경이 완성됐다. 나의 외모와 인상과 성격에 잘 맞는 듯했다. 다행이다. 마침 책 교정볼 일이 있어서 요긴해졌다. 마침 교정보는 책보다 더 깨알같은 글씨를 교정보는 업무가 기다리고 있어서 퍽 다행이다.

 

앞으로는 눈앞의 이익이나 권리보다 더 멀리 있는 안정과 평화를 바라보며 살아야겠다. 당장은 잘 보이지 않지만 나중에 드러날 어떤 위험 신호도 감지해 보도록 노력해야겠다. 아침저녁으로 눈을 적당히 비벼주고 컴퓨터 화면 한 시간 바라본 뒤 십 분 정도는 창 밖으로 눈길을 던져야겠다. 텔레비전 덜 보고 책도 덜 보아야겠다. 무엇보다 눈 건강과 가장 밀접한 간을 보호하기 위해 술을 멀리해야겠다. 올해 다짐했던 것, 술자리 반으로 줄이기, 술자리에서 술 반으로 줄이기를 꼭 실천해야겠다.

 

안경은 귀찮고 성가시고 재미 적은 물건이다. 그런 반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혜 몇 가지를 넌지시 일러주는 할아버지 같은 그 무엇이고 인류의 스승 같은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결론은, 고맙지 뭐!

 

2019. 3. 28.

시윤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빈낙도  (0) 2019.04.27
제사  (0) 2019.04.03
진당(珍堂) 황규완(黃圭玩) 교수님  (0) 2019.03.21
최근 나에게 일어난 일 두 가지  (0) 2019.03.04
설날 지낸 이야기  (0) 2019.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