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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대한 내 생각

‘탱자’ 가라사대,

by 이우기, yiwoogi 2018. 4. 17.

마을 한가운데 방앗간이 있었다. 정미소라고 했던 것 같다. 주인집은 방앗간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방앗간은 마을사람 들이 가을걷이한 벼를 쌀로 바꿔 주는 신기한 곳이었다. 방앗간 기계는 기껏 재봉틀이나 경운기만 보고 자란 우리가 보기엔 무척이나 컸다. 웬만한 집 두 배만한 크기의 방앗간 건물은 동네에서 가장 높고 큰 집이었다. 장날이 되면 요란한 기계 소리가 철제문을 뚫고 새어나왔다. 쿵더쿵쿵더쿵 세 박자 반주도 들리고 쇠르락쇠르락 쇠 닳는 소리도 들리고 쿵짝쿵짝 뽕짝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들은 제각각 나는 것인데도 묘하게 어우러진다. 방앗간 기계가 열심히 돌아가는 날 온 동네엔 쌀밥, 보리밥 익는 냄새가 저녁놀 가득 번지곤 했다.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건 참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랴라는 속담이 말해준다.

 

병호는 씨익 웃으며, 손으로 술잔 기울이는 흉내를 냅니다. 종수도 따라 웃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대로 지내우?” “염려 말게…… 돈이 못 되면 외상은 못 먹나?”(채만식 <태평천하>)

 

딱 봐도 술집 앞을 지나는 술꾼들의 대화임을 알겠다. ‘방앗간 참새 흉년 없다는 속담도 있다.

 

나도 한때 기름진 자릴 차지하고 있었지. 비록 말단이었지만 말야. 방앗간 참새 흉년 없다더라고 말단이었지만 괜찮았지. 그렇다고 당신 같은 사람 못살게 구는 그런 일과는 아예 상관이 없었어……. (조정래 <비둘기>)

 

그 방앗간 주위에서 혹시나 낱알이 튀어나올세라, 행여나 쌀알이 어디에 떨어지기라도 할세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참새떼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지나다니고 개와 닭도 심심찮게 지나다니는 한길 가에 있는 방앗간인데도 참새들의 놀이터이자 공격진지는 늘 있게 마련이었다.

 

탱자나무 울타리가 그것이었다. 방앗간 오른쪽은 주인집과 연하여 있었기에 따로 담벼락이 필요없었고 뒤쪽은 뒷집과 경계를 이루다 보니 자연스레 담벼락이 생긴 것인데 왼쪽에는 하릴없이 탱자 울타리를 치게 되었던 것이다. 탱자를 이야기하기 위해 애꿎은 참새와 방앗간을 불러온 셈이다.

 

탱자는 봄이면 하얀 꽃을 피웠다가 오뉴월 작고 파란 열매를 맺는다. 가을이면 제법 굵은, 그러나 사과나 배 따위 과일에 견줄 수 없이 작고 노란 탱탱한 탱자를 구워 낸다. 방앗간 옆 탱자 울타리는 마치 방앗간 주인이 해해연년 중학생 상고머리 이발하듯 깎고 잘라주어서인지 몰라도 꼭 흙담, 돌담처럼 반듯반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동네 형들은 어른 엄지손가락만큼 굵은 탱자 한 그루를 몰래 베어내어 맞춤하게 자르고 반듯하게 쪼개어 윷가락으로 쓰곤 했다. 탱자 윷가락은 밤나무 윷과 함께 상급으로 쳤다. 어떤 땐 손톱 밑에 낀 밤가시를 뽑아 낼 때 탱자 가시를 쓰곤 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나 할까. 늦가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탱자가 밀감보다 맛있다며 먹어보라는 동네 형들이 있다. 한번이라도 먹어본 친구는 지레 도망가고 말지만 그 꾐에 빠져본 적 없는 이는 영락없이 걸려들곤 했다.

 

탱자의 상징은 날카로운 가시다. 선인장 가시나 찔레 가시보다 훨씬 굵고 튼튼한 가시가 촘촘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그 가시의 단단함은 밤 가시, 아카시아 가시도 이기지 못하고 심지어 어머니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춤추는 바늘도 이기지 못할 듯하다. 거의 다 자란 탱자 가시는 검지 두 마디 길이에 끝은 갈색으로 아주 날카롭고 밑동은 약간 넓데데하게 퍼진 게 여간 전투적이지 않다. 무섭다.

 

탱자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눈앞에 나타나는 건 그 가시이고 그다음 생각나는 건 시고 떫어서 도대체 어디에 써먹을지 알 수 없는 노란색 열매이다. 봄에 피는 하얀 꽃은 눈여겨보지 않았던 시절이다. 탱자는 다양한 효능을 갖고 있다는데 그걸 일일이 알 필요도 없던 시절이다. 각종 피부질환과 기침, 감기 예방과 완화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들 한다. 몇 해 전 기침이 심할 때 탱자를 사 말렸었는데 아직도 냉장고 냉동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석갑산 꼭대기 주변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탱자 울타리가 있다. 어디를 못 들어가게 막고자 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도 아니고 조경용도 아니고 열매를 수확하기 위한 것도 아닌, 그저 거기 그렇게 탱자나무 여러 그루가 무리지어 모여 있다. 오며 가며 눈을 흘깃거리긴 하지만 자세히 관찰한 적은 별로 없다.

 

그런 탱자를 보면서 문득, 인간과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본다. 어데선가 이런 내용의 글을 읽은 탓이다. “탱자 가시가 아무리 날카롭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탱자 열매는 단 하나도 찌르지 않는다.” 정확한 글귀는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내용이었다.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탱자나무와 가시를 한번 자세히 보자. 얼마나 촘촘하고 얼마나 복잡한가. 그 날카로움이라니. 그런데 말이다. 정말이지 탱자 가시에 찔린 탱자 열매를 본 적이 있는가. 탱자 꽃이 제 가시에 찔려 죽는 일이 있던가. 탱자 가시에 찔려 죽은 참새를 본 적이 있는가, 있었더라면 좋아 했을 사람 많았겠지.

 

탱자는 제것은 제대로 품고 있다. 제 몸에서 나온 꽃과 열매는 절대로 찌르지 않는다. 저와 벗삼아 노니는 참새도 함부로 찌르지 않는다. 탱자 가지와 가시가 제아무리 복잡다단 뒤죽박죽 뒤섞여 있어도 꽃은 꽃대로 비죽이 비켜서 피어나고 열매는 열매대로 요리조리 자리를 마련하여 부풀어 오른다. 심지어 탱자 열매는 가시와 가시를 침대처럼 깔고앉아 여유 부리며 익어가기도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말 신기하기만 하다.

 

인간은 어떤가. 같은 인간끼리 싸우고 죽인다. 같은 나라 국민끼리 멸시하고 능멸한다. 한 동네 사람끼리 시기하고 질투한다. 한 회사 사람끼리 얕잡아보고 무시한다. 네 편 내 편을 갈라 등지고 척지고 산다. 당파를 만들어 비난하고 성토한다. 원수로 삼아 으르렁거리며 산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인간들은 탱자 가시보다 더 날카로운 혀의 가시를 드러낸다. 두 편으로만 갈라도 복잡하고 어지러울 지경인데, 한편인 줄 알았던 사람들도 등을 돌린 뒤 독 묻은 화살 날려보내는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댄다. 넓고 크게 보면 그게 그것 같은데 미세하고 세세한 차이 하나를 침소봉대하여 나는 너와 다르다, 너는 나와 다르다며 왼고개를 튼다. 한 마디 말을 평생 원한으로 삼고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뜬소문을 퍼뜨린다.

 

거의 10년 만에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고 한다. 민주 정부가 맞느냐고 따따부따 따지는 사람 가운데 자칭 타칭 진보라는 사람도 많다. 다시 역사를 되돌리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탱자 가지마다 날카로운 가시를 품고는 있으되, 꽃도 열매도 참새도 편안하게 그 속에서 노닐며 마침내 하나의 커다란 울타리가 되고 담벼락이 되는 것, 그 뜻을 받아들여 보았으면 한다. 이 나무가 저 나무 가지를 남이라고 찌르지 않고 저 가지 끝에 맺힌 탱자를 찔러 피고름나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스스로 모여 더 큰 하나가 되어 울타리가 된다.

 

탱자 울타리가 지키고자 하는 게 방앗간이라면, 우리가 애써 만든 민주 정부가 지켜야 할 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이다. 그 민주주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 없게 하는 것, 똑같은 일을 하면 똑같이 벌어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원칙이라는 걸 정했으면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 함께 지켜야 한다는 것, 한꺼번에 많은 국민이 죽음을 당하였으면 미리 막지 못한 것을 벌주고 다음에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책을 마련하는 것, 누구는 여성이라서 누구는 장애인이라서 누구는 성소수자라서 누구는 노인이라서 괄세, 멸시 받지 않게 하는 것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가는 길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서로서로 탱자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찌르지 않는 범위에서 어깨도 겯고 다리도 걸고 손가락도 걸어 절대 무너지지 않을 울타리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거센 바람 따위는 얼기설기 엮인 가시들 사이로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게 내버려 둬도 되겠지. 따뜻한 봄바람과 달콤한 봄비와 따가운 여름 햇살, 그리고 은혜로운 가을바람과 햇살은 서로의 가슴과 마음에 가둬 두어야겠지.

 

소중하게 보듬고 간직하며 키워내어야 할 꽃은 햇볕 잘 받도록 길을 터주어야겠지. 꽃 진 자리에 열매 맺히면 더욱 소중하고 귀중하게 지켜가야겠지. 탱자 가시덤불 속에, 사람의 손으로는 도무지 꺼낼 수 없게 잘 보관된 탱자 열매 한 알, 그 한 알을 샛노랗고 예쁘게 잘 키워낸 탱자 가시들의 여유와 배려를 보는 마음으로 우리들을 돌아보면 어떨까.

 


방앗간 집 아들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 살게 되고 방앗간 기계 소리는 점점 잦아들더니 마침내 멈추고 말았다. 철옹성 같던 벽엔 금이 가고 철제문엔 녹이 슬었다. 어느해엔가 모르게 기계들은 철물점으로 팔려 나갔다. 집집마다 간이 정미기계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돌 같은 잡것들이 전혀 섞이지 않은 곱고 흰 쌀을 진주시내 싸전에서 사 먹는 데 한두 시간이면 충분해졌기 때문이다.

 

허물어져 없어진 방앗간 자리엔 아직도 탱자 울타리가 봄이면 흰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단단하게 잘 여문 탱자 향기를 시금시금 피워내고 있다. 고향 찾는 오랜 벗들에게 여기가 방앗간 있던 자리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우리 인간들 다 죽은 뒤에 남는 것은 지독한 증오와 멸시, 죽임과 죽음뿐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다 보니, 끔찍하다. 탱자 가시에 찔린 것보다 백만 배는 더 아프다.

 

2018.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