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기를 봤다. 세르비아와 붙은 날이었다. 최근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 성적이 별로라서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못하는지 궁금했다. 나 같은 사람이라도 응원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결과는 1 대 1로 비겼다. 잘 싸웠다. 열심히 뛰었다. 격려해 주고 싶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국가대표팀 경기라고 하더라도 꼭 이길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다. 스포츠가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하지만, 실제 전쟁은 아니지 않은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이기면 좀 좋고 지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으로 봐 왔다. 하지만 이날은 ‘좀 이겼으면’ 하고 응원했다.
후반에 손흥민이 찬 공이 골로 연결되지 못해 무척 아쉬웠다. 대략 서너 골은 더 넣을 수 있었는데 상대방 문지기(골키퍼)의 거미손에 번번이 걸리고 만 것이다. 드러누워 보던 나도 벌떡 일어나 ‘아-!’ 하고 탄식했다. 평소에 이기든 지든 무슨 상관일까 하던 내 마음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꼭 한 골만이라도 더 넣어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스스로 좀 우습기도 했다. 손흥민은 주먹으로 땅을 쳤다. 해설자는 “네, 손흥민이 지구에 폭력을 행사하고 있군요.”라고 말했던 것 같다. 비유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축구 경기를 보면서 새로운 희한한 말을 듣고 말았다.
손흥민이 찬 공을 번번이 막아내던 세르비아 문지기를 일러 “슈퍼 세이버”라고 하는 것이었다. 워낙 건성으로 중계를 보긴 하지만, 이 말은 이번에 처음 들었다. 보통 문지기 실력이 뛰어나면 ‘거미손’이라는 말을 곧잘 쓴다. 그냥 “그 선수가 뛰어나다, 훌륭하다, 잘한다,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철벽방어다” 이런 말을 쓰곤 했다. ‘슈퍼 세이버’라는 말은, 적어도 나에겐, 느닷없이 뒤통수를 가격하는 꼴이었다.
슈퍼 세이버에서 슈퍼는 자주 쓰고 듣는 말이니 그런대로 알아들었다. 세이버는 무슨 말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막는다, 잡는다’는 말이겠지. 그러니까, ‘공을 잘 잡는 사람, 잘 막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중계방송을 끝까지 보는데, 아나운서는 ‘슈퍼 세이버’라는 말을 수십 번도 더 썼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다 잘 알고 있는데 나만 바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이 지난 오늘 드디어 이 말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보기로 하고 인터넷 들머리 사이트에서 뒤져 본다.
∙ ‘슈퍼세이버’ 손승락, 12월 예비신부와 결혼 ‘5년 열애 결실’ (뉴스엔 2010. 9. 28.)
∙ 정성룡 터키전 신들린 선방 ‘슈퍼세이버’로 거듭났다 (스포츠경향 2011. 2. 10.)
∙ ‘슈퍼 세이버’ 데 헤아, 맨유 10월의 선수로 선정 (인터풋볼 2014. 11. 3.)
∙ ‘슈퍼 세이버’ 하워드, 美 올해의 선수 선정 (스포츠조선 2014. 11. 21.)
∙ U-20 좌절 한국 눈물 났지만…‘슈퍼세이버’ 송범근은 빛났다 (헤럴드경제 2017. 6. 5.)
언론 제목에 쓰인 보기를 여기저기서 대충 찾아보니 이렇다. ‘슈퍼’와 ‘세이버’를 한 단어처럼 붙여 쓴 곳도 있고 띄어 쓴 언론도 있다. 제목이 아닌 기사 본문에 ‘슈퍼 세이버’를 쓴 것을 찾으려면 큰 느티나무 이파리처럼 많을 것이다. 언제부터 이 말이 널리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알 필요도 없겠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 말을 갖다 버리는 게 좋겠다. 축구 중계를 외국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왜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경기를 중계하면서 이런 말을 쓰는가. 이해하기 어렵다.
스포츠 경기 종목 가운데 외국에서 들어온 게 많다. 아니, 우리나라 고유의 태권도 등 몇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외국에서 들어왔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경기 용어를 외국어로 쓰게 된다.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말로 바꿔 써도 되는 게 많다. 베이스볼이라고 하지 않고 야구라고 하고 풋볼이라고 하지 않고 축구라고 하는 것만 봐도 영 엉뚱한 주장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야구 용어 중에 안타는 한자어이다. 투수, 포수도 한자어이다. 내야수, 외야수도 마찬가지다. 축구 용어 가운데 수비, 중앙선 같은 말도 영어는 아니다. 전반전, 후반전이라고 하는데 역시 영어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슈퍼세이버’는 뛰어난 골키퍼를 가리키는 것인데, 골키퍼라는 말도 수문장, 문지기라고 한다. 골을 잘 넣는 사람은 영어로는 골게터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골잡이라고 한다. 그렇게 말해도 모두 다 잘 알아듣는다.
오래 전 태권도 경기가 해외로 진출하여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금은 아주 일반화되어 있다. 외국으로 나가 태권도를 가르치며 먹고 사는 선수도 많다. 그때 태권도 경기 용어도 우리말을 사용한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품새, 차렷 같은 용어를 우리말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특정 경기 종목의 특정 용어는 원래 경기를 만들어낸 나라의 말을 사용하는 게 맞다고 할 수 있다. 꼭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일단 그렇게 봐주기로 하고. 그렇지만 그것 말고, 일반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말도 그 나라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일단 시비를 걸어 놓는다.
아무튼 ‘슈퍼 세이버’라는 말보다는 ‘거미손’(거미가 거미줄을 쳐 놓고 나방이든 모기든 파리든 죄다 잡아먹는 것을 비유한 것이니 정말 멋지게 잘 만든 말이다)이라고 하면 좋겠다. ‘특급 문지기’, ‘최강 문지기’라고 하면 어떨까. 이렇게 짓는 것 말고도 얼마든지 멋진 말을 만들 수 있으련만, 미국에서 쓰는 말을 줏대도 없이 마구잡이로 가져다 쓰는 아나운서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일까. 신문 제목에, 본문에도 슈퍼 세이버라는 말을 쓰지 못해 안달난 기자들은 그 신문을 누구에게 읽히려고 그러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사진: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 대한민국과 세르비아의 경기, 대한민국 손흥민이 슛을 하고 있다. (윈터뉴스에서 가져옴)
2017.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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