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비봉산에서 봉황교까지-무엇이 비봉산을 살리는가
일요일이다. 눈을 뜨니 일곱 시다. 일어나지 않고 드러누운 채 머리를 굴린다. 어디로 튈까. 밥을 대충 챙겨 먹는다. 옷을 갈아입고 긴 우산 하나를 챙긴다. 비가 올 듯 말 듯해서다. 비 오면 우산으로 쓰고 비 안 오면 지팡이로 씀 직한 튼튼한 우산을 울러매고 대문을 나선다. 비봉산을 목적지로 정한 것이다. 평화교회 건너편에서 오전 10시에 252번 버스에 오른다. 공설운동장 지나 상봉아파트 지나 진주여고 앞에서 내린다. 길 건너편에 ‘블랑제 파티쉐’라는 빵집이 보인다. 요즘, 근로자 불법 파견 문제로 시끄러운 ‘파리바게트’ 같은 가맹점(프랜차이즈)의 등쌀에도 불구하고 용케 저 이름을 간직한 채 길모퉁이를 지키고 섰구나 하는 마음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진주여고 사거리에서 지금의 봉원중학교 방향으로 가는 길은 익숙하다. 초등학교 시절 내 고향 ‘안간’으로 가는 마이크로 버스가 지나던 길이다. 중간에 있는 ‘봉산사’(鳳山祠) 앞에 선다. 진주강씨 시조인 고구려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강이식 장군은 고구려 영양왕 9년(598면) 임유관 전투와 영양왕 23년 살수(薩水) 대전에서 을지문덕 장군과 함께 수나라 130만 대군을 무찔러 나라를 구한 인물이라고 한다. 진주의 3대 성씨는 강(姜) 하(河), 정(鄭) 씨인데 그 가운데 강씨의 시조를 모신 곳이다. 해마다 음력 3월 10일 전국의 진주강씨 후손들이 모여 향사(享祀)를 봉행하고 있다고 한다. 높다란 계단을 올려다본 뒤 잠시 묵념한다. 그가 목숨 걸고 싸워 준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가 살고 있다고 여겨서이다.
진주여고 뒤쪽 찻길을 걷다가 등산길로 훌쩍 올라선다. 허리만한 것에서 허벅지만한 것까지 참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참나무 뿌리들은 땅속 깊이 들어간 것도 있지만 땅 위로 툭툭 불거져 나와 등산객들의 발 받침이 되는 것도 많다. 고맙다. 굴밤 껍데기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실제 굴밤은 보이지 않는다. 근처에 사는 부지런한 분들이 벌써 비질하듯 청소해간 것이다. 그들은 직접 도토리묵을 쑤어 먹을까, 아니면 시장에 내다 팔까. 고개를 돌려 시내 쪽으로 본다. 진주여고 건물도 보이고 갤러리아백화점도 보이고 롯데인벤스 아파트도 보인다. 망진산도 보이고 그 아래 뾰족뾰족 솟아오른 한보아파트도 눈에 들어온다. 진주성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숲도 들어온다. 곳곳에 이쑤시개처럼 선 길죽한 굴뚝들은 목욕탕이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비봉산 정상에는 다리쉼을 할 수 있는 정자도 있고 이런저런 운동을 할 수 있는 시설도 갖춰져 있다. 이런 모습은 아주 흔한 것이어서 새로울 게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까운 뒷동산에 올라 운동으로 건강을 다질 수 있다. 이런 것도 복지(福祉)에 해당한다. 나는 이런 데서 세금 내는 자의 보람을 느낀다. 약수터도 있다. 약수의 수질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없어 조금 께름칙하지만 물병을 준비하지 않았던 터라 한 모금 달게 마신다.
그냥 흙길로 내버려 두어도 되었을 길을 굳이 수입목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시청 공무원들의 배려를 느끼며 천천히 걷는다. 반대로도 생각한다. 울퉁불퉁한 길은 아주 조금만 편편하게 해주고 미끌미끌한 길은 크게 미끄러지지 않을 만큼만 조치해 주어도 되지 않았을까. 자연에다 그 무엇을 더한다는 것은 최소한으로 그쳐야 하지 않을까. 지금 걷고 있는 ‘데크’는 혹시 과잉이 아닐까. 배드민턴장을 지나고 나니 길은 더욱 넓어지고 흙은 더욱 단단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오르내렸을까. 비봉산 앞쪽이 진주시내라면 그 뒤쪽은 한번도 본 적 없는 시골 마을이다. 앞과 뒤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도시와 농촌’이라는 말로 휘갑을 치기엔 부족하다. 천왕봉이 저 멀리 구름 사이에 희미하게 보인다.
비봉산은 최근 환경정비가 대대적으로 진행되는 산이다. 지난해부터 갑자기 비봉산이 화제가 되었다. 비봉산이 왜 화제가 되었을까. 비봉산은 언제부터인가 대규모 건축물 축조, 아스팔트 자동차 도로 개설, 무분별한 농업 개발 등으로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뜻 있는 시민사회단체와 지역언론이 나서서 비봉산 살리기를 제창하였고, 비로소 ‘비봉산 제모습 찾기사업’이 환경부 공모사업에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국토 생태네트워크 구축과 자연환경 보전을 위한 국비 지원 사업으로 봉황교~비봉산 생태 탐방로 조성, 비봉산 봉황숲 생태공원, 비봉산 산림공원 등 3개 테마 110㏊에 대하여 76억 원의 사업비를 들인다. 2017년 조성 목표로 추진한 사업이어서 공사가 한창이다. 이상한 것도 있다.
비봉산에서 의곡사로 내려서는 길은 너비 3m는 족히 됨 직하게 콘크리트 포장을 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굴삭기가 비탈을 깎아 넓은 길을 내고 있다. 이것도 다 비봉산 살리기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다. 좀 거꾸로 가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건 나뿐일까. 비봉산, 선학산이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망가져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선학산과 비봉산 일대 정비를 통해 지역 명소 조성과 더불어 산림복원을 위해 연차적으로 산림휴양 공간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를 2015년 6월 21일(경남일보)에야 보게 된 것은 좀 심하지 않았나 싶다. 비봉산 정상에서 봉황교로 가는 길은 신작로 같다. 공사용 트럭과 인근 묘소 벌초객들의 트럭이 무시로 지나다니는데 잘하면 관광버스도 충분히 올라올 수 있을 것 같다. 과수와 밭작물을 수확하자면 트럭이나 경운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 그것은 뛰어넘기 어려운 일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려온다. 의곡사 스님의 목탁소리 같다.
진주향교 뒷산 즈음에 이르자 시야가 탁 트인다. 봉래동, 수정동, 장대동, 옥봉동 낡은 집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몰론이요,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새벼리, 주약동과 평거동, 판문동까지 보인다. 진주교와 천수교 사이엔 유등축제가 한창이고 바로 눈 아래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휴가객을 실어나르는 버스들이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 그러한 것들이 조용히 눈에 들어온다. 명석 나들목인 이현동에 위치한 웰가아파트, 옛 진주법원 자리에 우뚝 선 롯데인벤스, 그 앞 갤러리아 백화점, 망경동 한보아파트, 주약동 아파트 단지, 신안ㆍ평거동 아파트 단지 들도 모조리 다 보인다. 지금 법원도 보이는데 그 뒤에 있는 우리집을 가늠해 본다. 시력이 부족하다. 이름을 아는 건물, 모르는 건물들이 높이를 경쟁하듯 도열했다. 진주라는 도시의 규모가 이렇게 컸던가 싶다. 저 속에서 장삼이사, 선남선녀들은 무엇을 하며 밥벌이를 하는지, 누구와 만나 사랑을 나누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들 살고 있는지.
뒤쪽으로 돌아선다. 아뿔싸. 거기엔 초장동이 펼쳐져 있다. 처음 비봉산을 오를 땐 시내 쪽 그림이 어떨지 그것만 궁금했는데, 그 뒤쪽에도 광할한 만주벌판 같은 넓이의 진주가 버티고 있던 것이다. 십여 년 전이었으면 비닐하우스와 누렇게 고개 숙인 벼들이 들판을 가득 메웠을 초전들. 지금 거기엔 큰형이 살던 푸르지오 아파트처럼 20층 넘는 건물 수십 동이 빽빽이 들어찼다. 격세지감이다. 금산교 건너 아파트 단지들도 보인다. 비닐하우스에 고추, 가지, 오이 농사를 지어 대학생을 키우던 농부들은 어디로 갔을까. 자기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운 좋게 고층 아파트 좋은 층을 얻어 내었을까. 공군부대 막사들 지붕도 올망졸망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는 진주종합경기장, 그 옆으로는 혁신도시, 또 그 옆으로는….
진주의 진산 비봉산에 오르니 앞과 뒤, 과거와 현재와 미래, 화려함과 누추함, 희미함과 뚜렷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속에 웅크리고 사는 진주 사람들의 겉모습이 아련하게, 때로는 선명하게 다가온다. 혁신도시가 들어서는 바람에 한쪽에서는 으리으리한 건물이 번쩍번쩍 솟아오르는데 옥봉, 봉래, 수정, 장대동 사람들 중 몇이나 혁신의 꿈을 이루어 낼까. 그들도 수십년 붙박이로 살아온 고샅을 버리고 정다운 이웃도 버리고 삼십, 사십 평 아파트를 얻어 이삿짐을 쌀까. 진주는 앞으로 얼마나 더 변하게 될까. 조금 무섭고 두렵다. 그럴 까닭도 없건만. 빗방울이 한두 가닥 떨어진다. 우산을 펼 만큼은 아니다. 봉황교 입구에 만들어 놓은 작은 공원 화장실에서 손 씻고 등산화 털고 말티고개로 내려선다. 151번 버스가 달려오기에 손을 들었다. 봉황교에서 연암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선학산은 뒤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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