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검찰개혁’의 핵심 공약인 ‘고위공직자 범죄 수사처’(일명 공수처)에 대한 정부안의 윤곽이 나왔다. 법무부 산하 법무ㆍ검찰개혁위원회가 9월 18일 발표한 권고안을 보면 공수처는 고위공직자의 범죄 수사에 대해 검찰ㆍ경찰 등 다른 수사기관보다 우선권을 갖는다. 규모는 검사 50명을 포함해 수사인원만 최대 122명에 달한다. 말 그대로 막강한 조직이다.
이를 보도하는 언론을 보면 ‘슈퍼 공수처’라는 말이 나온다. 대개 ‘슈퍼’라는 말은 긍정적인 표현이다. 외계인의 침공으로부터 지구를 구하는 <슈퍼맨>, 언제든 무엇이든 다 있는 동네 슈퍼마켓, 자신의 아이를 완벽하게 돌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아버지들의 이야기 ‘슈퍼맨이 돌아왔다’, 옷에 찌든 때를 깔끔하게 세탁해 주는 ‘슈퍼타이’ 등 대부분 긍정적으로 쓴다. 슈퍼마켓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말이 많긴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언론들이 이 ‘슈퍼’를 부정적인 느낌으로 쓴 것처럼 보인다. <동아일보>는 ‘‘슈퍼 공수처’ 견제-통제장치 허술’이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조직이 너무 크고 막강하다 보니 견제하고 통제하기 어렵다는 뜻을 담았다. 케이비에스(KBS)는 ‘막강 권한 ‘슈퍼 공수처’ 중립성 유지는?’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앵커는 “법무부의 이번 공수처 안은 조직과 권한 면에서 ‘슈퍼 공수처’라고 불릴 만큼 막강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권한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사용하고 견제할 방안은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봅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공룡 사정기관’이라는 말에도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강하다. 공룡은 지구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또는 그렇게 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공룡’이라고 한 건 아니겠다. 어쨌든 어떤 조직의 이름 앞에 ‘공룡’이라는 말을 붙이면 그 조직은 좀 비대하다, 굼뜨다, 더디다,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매머드급’이라는 말도 비슷하다. <뉴스1>은 ‘매머드 공수처 예정에 “권한남용 우려”…법조계 비판’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좋게 보지는 않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매머드도 멸종했다.
몇몇 언론은 ‘슈퍼 공수처’라고 썼고 몇몇 언론은 ‘수퍼 공수처’라고 썼다. ‘슈퍼’가 맞느냐, ‘수퍼’가 맞느냐 한번 이야기해 볼 만하다. 영화 슈퍼맨을 방영하던 텔레비전 화면에는 분명 <수퍼맨>으로 적혀 있었다. 이게 맞을까 싶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슈퍼맨’(superman)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써 놨다. ‘슈퍼마켓’(supermarket)의 준말도 ‘슈퍼’라고 올려놓았다. 노라조라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 제목도 ‘슈퍼맨’이다. ‘super’의 표기는 ‘슈퍼’가 맞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는 ‘수퍼’라고 썼는데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공수처의 출범은 시대적 과제다. 권력형 비리를 수사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2013년 폐지된 뒤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수사하기 위한 독립된 수사기구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어 왔다. 그럼에도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케이비에스(KBS)는 “공수처 신설 내용을 담은 관련 법안이 지난 20년 동안 13차례 국회에 제출됐지만 수사의 중립성에 대한 정치적 논란 때문에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보도했다. 이번에도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벌써 ‘슈퍼’, ‘공룡’, ‘매머드급’이라는 말이 언론 보도에 등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겠다.
공수처가 정말 필요하고 이에 대해 모든 정치인, 법조인, 언론, 일반 국민이 동의한다면 그냥 ‘강력한 공수처’, ‘막강한 공수처’라고 하면 되겠다. ‘슈퍼’라는 외래어를 갖다 붙일 까닭이 어딨나? 강력하고 막강한 힘이 있어야만 대통령 주변 인물을 비롯해 고위공직자들을 제대로 수사하고 처벌할 수 있을 테니까. 좀더 풀어서 ‘서슬 퍼런 공수처’라고 하면 어떨까. 물론 ‘서슬 퍼런’이라는 말은 공수처 자체를 설명하는 말이라기보다 그 공수처가 출범하여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때 붙일 만한 말이긴 하다.
공수처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짐작해 본다. 한 국가기관의 권한이 너무 막강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있을 것이다. 어떤 권력기관이든 견제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경찰, 검찰, 법원,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대통령 등 모든 국가권력기관은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게 꼭 필요하다. 공수처라고 해서 예외여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칫하면 공수처가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또는 옥상옥(屋上屋)이 될지 모른다. 그건 안 된다. 이런 생각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두기 어렵다. 모두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겠지만 몇몇 사람들은 ‘나중에 내가 저 공수처의 수사를 받을지 모른다. 그냥 검찰이나 경찰은 피해갈 수 있겠는데 저 공수처만은 절대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죽는다. 그러니까 공수처는 필요 없어. 아니 권한을 최소한으로 만들어 놔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도 죽고 우리 편은 다 죽어. 아 무서워. 빨리 힘을 빼버리자. 여론을 우리 편으로 만들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설마 그러기야 하겠는가마는 어떤 사람들은 분명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2017.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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