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일요일이니 보름은 훨씬 지났다. 점심 즈음 본가에서 어머니와 노닥거렸다. 전화가 왔다. 지정학적으로는 ‘동네주민’이고 나이로는 ‘후배’이고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삶에서는 ‘어른’인 사람이다. 이름은 일단 감춰둔다.
‘덕산약주’를 한 상자 사 왔는데 두어 병 줄 테니 가져가 드시란다. 궁금증을 달래주려는 것인지 사진도 몇 장 보내준다. 본가에서 출발할 때 전화하기로 했다. 그의 집과 우리 집은 걸어가면 3분, 뛰어가면 30초 정도 걸린다.
우리는, ‘덕산’이라고 하면 산청군 시천면 어디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덕산이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거나 들었더라도 기억하지 않는다. 아무튼.
오후 3시쯤이었을까. 그의 집으로 갔다. 술 준다는데 마다할 까닭이 없다. 동네에 다다를 즈음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문자도 대답이 없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쨌든 집앞에 당도하여 초인종을 눌렀다. 그의 부인이 대답했다. 들어갔다. 검은 비닐 봉지에 든 ‘덕산약주’ 두 병을 건네주려는데, 주민 겸 후배 겸 어른인 사람이 나온다. 그새 낮잠을 잔 모양이다. “잠깐만”이라더니 따로 한 병을 더 갖고 온다. 냉장고에 넣어둔 것이다!
검은 비닐 봉지에 든 것은 그냥 주는 선물이다. 언제든 마실 수 있는 술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술 선물을 받은 사람, 특히 나 같은 사람은 어찌할까. 보나마나 집에 오자마자 한잔 하고 싶어지겠지. 주지상정! 그런데 술이 미적지근한 단계를 넘어 뜨뜻미지근하면 어떨까. 하여, 그는 미리 한 병을 냉장고에 넣어둔 것, 그런 것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배려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느꼈다. 그의 ‘배려와 애정’을 느꼈다. 더운 날 현관 앞에 서서 이러쿵저러쿵 긴 인사를 할 필요는 없겠다 싶고, 굳이 해야 할 인사가 있다면 언제든 쉽사리 한잔할 기회가 있으니, 그냥 인사만 하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는 짧은 길에 아내에게 그 마음과 심정과 생각과 배려를 잠시 이야기했다. 아주 사소한 듯하지만 받아들이는 쪽 마음에는 큰 울림이 있는 것. 억지로 꾸며내지 않았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예비한 듯한 것. 그런 것이 배려란 것 아닐까. 집에 와서는?
난 이 술을 감히 함부로덤부로 마셔 없애지를 못하겠던 것이다. 며칠 지난 뒤 드디어 개봉하여 한두 잔 마셔보고, 다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다시 한 모금 마셔보고, 다시 뚜껑을 닫아뒀다가 꺼내어 입술을 축여보고 그렇게 지금까지 지내왔다. 아까워서, 고마워서, 애틋하여, 기특하여, 또 고마워서... 8월 9일 저녁 현재 세 번째의 병을 땄지만 이 병의 바닥을 언제 볼지는 아무도 모른다.
‘덕산약주’는 11도다. 알코올 11%라는 뜻이다.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입에서 착 달라붙는 이 술이 식도를 지나 위에 도착하여서는 제 힘을 발휘하는가 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경로를 통하여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지는 듯하다. ‘알딸딸’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정도의 취기가 오른다. 신비롭고 희한한 술이다. 지금까지 마신 그 어떤 술과 비교해도 같은 맛은 찾을 수 없다. 억지로 갖다대자면 ‘술 익는 마을’의 동동주가 이와 비슷할지. 그래도 그건 아니다. 아무튼 그런 예술적인 맛이다.
병을 살펴보니, 덕산은 허영만 화백의 <식객> 100화 ‘할아버지의 금고’ 소재지이고, 케이비에스(KBS)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촬영지인 진천군 덕산면이라고 한다. 내가 언제 거기까지 갈 일이 있겠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동네주민 겸 후배 겸 어른이 세심하게 배려해 준 덕분에 이런 인생의 술을 마셔보는 것이지. 고맙고 또 고맙다.
8월 9일 저녁 아늑한 거실에 세상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한잔 그윽히 따라 그의 배려를 마신다. 취한다. 정에 취하고 배려라는 강력한 마약에 취한다.
2017.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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